작성일 : 17-09-19 14:29
사회구조의 쇠락과 시민성 ( Civility )의 회복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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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의 쇠락과 시민성 ( Civility )의 회복

어느 날 일산에 있는 아파트로 가던 중, 탄현동이라는 지역을 지나가는데, 그 좁은 지역에 남녀 고등학교 2, 중학교 2, 초등학교 3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국가적으로는 신생아 출생율이 하락하는 것이 문제로 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예외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등, 하교 시간에는 거리들이 떠들석 해지는 것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또 외국의 논평을 빌리자면, 행복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미국의 철학관계 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엇이 행복감을 주는 가? 에 대한 물음에 처음에는 경제적 부, 재산, 높은 사회적 지위 라고 대답하였으나, 결국에는 자식들의 행복한 삶이 내 행복의 근원이라고 대답하는 것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인 들은 다르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 학교들을 지나면서 어느 한 초등학교 교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크게 써 붙여진 것을 보았다: " 언어 폭력은 마음의 상처, 고운 말은 마음의 치료약". 그 옆에는 2017년 "교내 바른 마음 고운 언어 표어 공모 최우수작" 이라는 글이 병기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는 정당대표들, 그리고 국회의원들 간에 “막말”이 문제가 된 적도 있었고, 최근에는 댓글에 나타나는 위협적인 표현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더욱 암울한 전망을 가지게 하는 것은 10대, 또는 청소년들의 폭력, 살인, 교사에 대한 폭행 등 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생각하는 고운 말은 바른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또 바르지 못한 마음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의 폭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성경에서도 어린 아이들의 초롱 초롱한 맑은 눈과 온순한 마음이 주님에 대한 신앙에로 들어 가는 좋은 본보기로 제시되어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 위에 어린애 같은 겸손함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겸허하며, 거짓 없는 신앙만이 어린이 같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다.
이들이 자라면서 거치게 되는 사회생활은 그러나 그 어려움이라는 명분 때문에 거칠은 성인, 상호 불신의 만연, 시민성의 상실, 등으로 표현되는 현실에 타협해야 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배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시민성의 윤리적 의미
시민성 ( Civility ) 의 의미는 그 어원적인 의미에서 사회의 시민이 지니는 사회적 속성들로 표현되고 있으나 이와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에서 비롯된 "정숙성, 엄숙성" 등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인이 시민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민이 정치과정에의 참여에 의해 그 정치적 의무를 수행하는 여러가지 기능에서 이 civility 는 나타나며, 그 때 개별적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의 가치 목표, 공동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같이 생산적으로 일하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며, 이 때 이를 부연해서 이 Civility 를  politeness 의미로 쓴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Trump 의 대통령 선출 이후 미국에서의 시민성 ( Civility )이 악화되었다고 보는 정도가 70% 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것을 보도하는 Jessica Taylor 는 같은 보도에서 시민들 가운데서 국가의 근본적, 민주적 제도 들에 대한 불신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의회에 대한 태도에서 46%가 불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NPR poilitics, Jul. 3, 2017 )
그러나 Mike Lee 상원의원은 미국인들이 빈, 부를 떠나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생산성의 문제나 임금의 문제가 던져지고 있으나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사회구조의 쇠락은 가정과 건전한 공동체의 객관적 정도와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슴을 강조하고 있다. ( America's Social Fabric is Eroding, The Daily Signal, May 23, 2017 ) 
2016년 AP의 NORC center 는 지난 수 십 년을 통해 미국인의 74% 가 그 언어 태도나 행동에서 악화되고 있슴을 지적하고 있고, 특히 미국인들의 대부분은 정치인들이 일반대중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으나 그 기대에 실제적으로 못 미치고 있슴을 지적했다. ( Science Daily, Apr. 22, 2016 )
이것이 미국에서 만의 문제인가? 한국 경제 8월 12일자 사설의 제목은 " 성숙한 민주주의에 좌절감 갖게하는 풍경들" 로 한국의 민주주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설이 고발하고 있는 좌절적 풍경이란 다수 집단이 소수를 억압하고, 타인의 자유를 쉽사리 침해하고,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외면하는 행태와 언동, 합리적 근거도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면서 억지를 부리며, 북 유럽국들의 복지를 주장하면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시민의식에는 관심이 없는 행태들을 말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권리만큼의 책임, 자유만큼의 의무, 개별적 이익만큼의 공익을 의식하는 시민이 축소되는 한 민주주의의 지속적 유지는 멀어진다. 이 사설은 나의 배려와 절제가 타인의 희망과 기회가 되는, 熟慮와 성숙한 시민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2011년에 이 시민성의 문제로 사회조사를 했던 Weber Shandwick 도 미국인의 72% 가 근년에 시민성이 악화되었다고 보고 있고 이들의 94%는 사회적 문제로 되었다고 보았고, 그 중 65%는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경기가 한 몫을 하고 있었고, 특히 Cyber 에서 상대방을 욱박지르거나 , 모욕적인 독설을 퍼붓는 일이 점점 증대하고 있고, TV news 와 정치인들간의 비열한 논쟁이 공공 광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의 온상이나, 견해의 차이에 대한 공적인 장소에서의 비방은 책임 의식을 지닌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견해를 밝히거나 투표를 하려는 의사를 포기하게 되며, 점점 더 폐쇄적 미디아로 도피하게 만든다고 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 미디아들은 “ --- 이 찍으면 죽는다. “ 라는 극단의 표현을 정당의 태도와 관련하여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혐오스런 외국 용어들을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의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정당들에 자체 윤리강령이 있슴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태와 언동을 억제할 태도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방조되는 느낌이다.

성숙과 민주적 자산 ( Democratic Capital )
위에 지적한 일간 신문이 민주주의의 성숙으로 이 시민성의 쇠퇴를 극복할 것을 천명한 것으로 결론을 냈으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미국이나 유럽국가 들은 자기들의 기독교적 전통, 그리고 합리주의적 자유주의에 뿌리밖은 역사적 환경으로의 회귀를 통해 그 시민성의 회복을 어렵지 않게 실행할 수 있으나, 그 민주적 자산이 충분치 못한 한국과 같은 나라들의 시민성의 회복은 성숙의 문제로 해결될 것은 아니다.
 민주적 자산이 불 충분한 상태를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문제성을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사실상 그 문제성의 인식은 그 출발에서 50%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스웨덴의 Torsten Persson 은 민주적 자산을 작동적 의미로 정의하면서, 첫째는 국내적인 민주적 자산, 곧 시간을 두고 축적된 민주적 경험, 민주적 제도화 등 의 요소, 그리고 두번째는 외국의 민주적 환경의 영향. 과 같은 민주적 자산의 요소로 나누었다. 곧 외국의 민주제도와의 문화적 밀접성, 등이다. ( The Nexus of Political and Economic Change, 2006 March ) 그는 어느 나라의 민주적 안정성은 이웃 민주국가와의 인접성에 영향을 받고, 민주적 지배의 전통을 가졌을 때 확보될 수 있으며, 이 안정된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을 통해 공고화 될 때, 민주적 자산이 축적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정치인들의 시민성을 상실한 언동들은 민주주의의 기본에서 일탈된 것들로서 치유되어야 할 사회 심리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서 자유를 언급할 때, 그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입장을 바꾸거나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때에 평등의 문제가 제기되며, 여기에서 정의는 하나의 권리가 될 수 없다.
Plato는 , Kirk 에 의하면, 정의 ( Justice )를 개별적, 개인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의 둘로 나누어 생각한 것으로 보았다. 개별적, 개인적 정의는 그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보는, 곧 개인이익에 동요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며,모든 사람과 공정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사람들로서 경쟁이 아닌 조화와 균형에 의해서 형성된 사람들에서 나타나며, 사회적 정의는 마찬가지로 균형과 조화로 특징되며, 개별적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 전체적인 정당성, 합리성과 의지를 지닌 정부들에게서 나타난다.
James Shall 은 사회의 富의 80%를 소수 소득 상위자들 20% 가 점유하고 있다는, 따라서 사회적 부정의 (Injustice )로 제시되는, 통계의 계속된 주장은 부의 생산의 원인과 전체 경제의 성장을 철저하게 간과한 것이라고 하면서,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 부터의 획일적인 正義는 위에서 언급한 개인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무시한 것이며, 개인의 차이, 기호의 차이, 그리고 기능의 차이를 인정한댜면, 조화와 균형을 중요시 하는 개인의 정의와 공동체적인 정의를 인정하고 그 도덕적 성취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Collin Barnes 는 미국에서 심리학의 부분 학문인 사회 심리학회가 가장 많은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시급한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한 연구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연방 정부로부터 있어 왔슴을 강조하고 있다. .
이런 문제를 고려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Robert Putnam 이 지적하는 사회적 신뢰의 문제이다
그 는 2000년에 쓴 “Bowling Alone”, 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의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고, 어떻게 하면 재생할 수 있는 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Putnam 은 미국의 사회적 자본의 중심으로 구성된 미국인들의 사회적 삶의 구조들, 사회적 접촉의 모든 형태가 축소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런 축소는 기술적 발전의 영향, TV, 인터넷의 영향, 그리고 사회 평등의 변화, 공공정책의 사회적 자본에의 축소로 이어 졌다고 하면서 이에 대해 시장제도, 민주주의 활성화 등으로 사회 구조 ( Social Fabric )를  재생시켜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는 가족, 공동체. 직장, 종교적 집회 등으로 사회적 연대를 살리고 공동체 삶의 건전성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사회적 협력적 Network, 사회적, 정책적 지원, 상호성과 상호 의무의 규범으로 사회적 신뢰, 단결을 강화해 사회적 자본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편화된 국민과 자기 제어 없는 자유
원론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보면, 聖 오거스틴은 "City of God" 에서 " 사람" 에 대한 정의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의 분열을 규명하고 있다. 그는 " 사람들" 을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나누기 ( share )를 동의함으로써 결합된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집합된 다수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더 이상 동의하지 않고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서 이 정의는 오히려 불화의 원천으로 되어 사회적 해체를 가져오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이것은 단순히 국가의 나눔이라는 정책과 경제 체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John Horvat II 는 진단 하고 있다. ( A solution for a Fragmented America, Feb. 24, 2017 )
나눔, 동의, 사랑은 그 성격상 사회를 통합하는 행위이며,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원칙으로서 통합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으로 이용되는 사회적 제도를 나타낸다.
고전적 의미에서 자유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감정에 사로 잡히기를 피하려는 개인들의 자기통제 ( 克己 ) 를 의미하며, 이것은 善하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가 善을 구분하도록 도와 주는 도덕적 질서를 상정하며, 법의 지배를 지지해 주는 것이다.
자유를 이해하는 더 낳은 방법은 우리가 가족, 공동체, 그리고 신념 등의 넓은 기반에서 충분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이며, 이 사회제도는 미래에 대한 혐오스런 족쇄가 아니라 편리한 과정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자유를 용이하게 해 주며, 우리가 사랑, 나눔, 에 동의하는데서 단결하도록 도움을 주며, 이러한 정연한 자유의 맥락에서 공동의 선 ( 善 )은 창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히도 자유의 왜곡된 개념에서 분열의 원인이 발견되었고, 과거에 통합의 요인이었던 다양성을 축복하였던 자유가 우리를 분열시키고, 서로를 급격하게 불화로 이끄는, 나라를 찢어 놓는 경쟁의 "눈" 이 되게 되었다. 문제가 이제는 자유 자체가 아닌 자유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이냐의 문제가 되었다.
계몽주의에도 포함되어 있는 생활의 궁극적 목표를 자아실현, 자아완성의 달성, 곧 "자아"의 재형성, 이라고 보는 이들은 이 자아실현을 어느 것도 금지할 수 없으며, 경험에의 한계, 제한을 거부하고 있으며, 이러한 뒤틀린 자유의 전망은 사회제도를 개인의 표현을 억제하는 장애물로 보고 법, 제도적 질서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면서, 다양성의 이름으로 무절제와 혼란의 요소를 도입하고, 자유의 근본을 침해하며 자유의 의무적 요소를 거부하면서 그 자격만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립되고 제한된 개인주의적 사회체제에서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고 사랑하는 것이 너무 제한되어 있기때문에 공유보다는 분열의 현상만 강조되며, 특히 우리 자체가 법을 만드는 체제에서는 죄, 악행, 불화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는 환상과 공상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자유의 개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분열만 있을 수 있으며, 이 사회를 지탱해 온 사회적 자본은 탕진이 되어 모든 것이 파편화 된다는 것이 Horvat II 의 주장이다.

사회적 신뢰와 분노
최근에 보도된 일부 청소년들의 폭행 사건이 사회적 관심과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그 대책이 강구되어 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소년법" 에 대한 개정 문제로도 제기되는 이 문제는 10년 전에도 거의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어 소년법에 해당되는 년령을 12-20세에서 부터 10-18세로  변경시켰다. ( 2007년 소년법 개정 )
문제는 이 후에도 소년들의 범법 행위가 줄어 들지 않고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잔학한 폭력 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는 데서 이들에 대한 더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라는데 있다.
정부는 여성가족부 를 중심으로 2006년 부터 청소년 사화안전망 구축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 왔으며, 2016년 부터 이를 위한 청소년 상담, 복지 지원센터가 구축되기 시작하여 2017년 5월 현재로 전국에 걸쳐 총 225개 가 설치되어 있다. 대도시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로 설치되어 있는 이 센터는 여중생 폭행 문제가 일어난 부산 사하구에도 명칭은 조금 다르지만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청소년을 위한 활동에서 성폭력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인상을 받았다.
이 문제를 파악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이들 폭행 학생들이 이미 같은 성격의 사건으로 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된 상태에서 일으킨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보도를 통해 나오는 사건의 사실적 요소와 과장된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적으로도 이들에 대한 강한 처벌을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한 것이냐에 대한 의견의 차이가 노정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정부가 행하고 있는 정책과, 사회가 실제로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은 사회적 불신의 문제와 관련이 되기 마련이다. 이 불신은 이 체제와 관련된 정치적 승리를 위한 정치인들의 이용물이 될 수 있는 분노의 문제로 악화될 수도 있다.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강력하고 든든한 바탕은 공동으로 덕목을 갖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신뢰에 기초를 둔 수많은 개인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이 유대관계는 신뢰의 기반을 가족, 공동체 사회 에서 찾을 수 있다.
Horvat II 는 이 사회를 유지시켜 주는 사회적 존중, 애정, 예절 등이 조직적으로 순횐되지 않고 참신한 생각의 이동이 없으면 사회적 역동성은 상실될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거대해진 제도와 지배적인 관료제에 시민들은 동일시를 느끼지 못하며, 거기에 따른 분노한 정치에서 오는 소외와 정체의 느낌만 팽배해 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 전체나 공동 선에 대한 관심보다는 단결이 없는 잘못된 다양성을 추구하는 피곤한 일만 하면서, 분열과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로 부터 "편협하고 비관용적인 " 사람들로 낙인이 찍혀 버린다. 이러한 불신의 정치적 분위기는 수많은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면서 분노의 정치로 치닿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분노가 각자가 그 자신의 권위와 법을 만들게한다면 사회는 불가능하게 된다.
Joseph Pearce  는 분노의 파도는 증오의 정치를 부상시키게 하며, 이 증오는 편견에서 부터 비롯 되며, 이 편견은 자기 중심주의로 부터 시작된다고 하고 있다.
14세의 여학생을 구속하면서 사회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잔학한 폭행은 스스로 나온 것인가? 사회가, 어른이 그것을 포용하고 관용할 수가 없다면, 그래서 그 여학생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것을 사회적 대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더 포용적이고 과학적인 사회 심리적 대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 여학생을 강한 처벌로 징계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분노의, 증오의 정치라고 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런 강한 처벌로 사회인들은 사회인으로 pride 를 느낀다면, 그것이야 말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김 영식 17-09-1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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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신 분 들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