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2-08 00:10
하와이의 싱그런 바람을 그리며,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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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의 싱그런 바람을 그리며,

19882 8일 오후 3시경, 나는 L.A. 로 부터 하와이의 호놀루루 공항에 도착하여 열대 지방의 열기를 식혀 주는 싱그러운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공항에서 나는 하와이 공보관을 만났고, 그 공보관이 타고온 군용 짚차를 타고 곧장 해군 기지로 출발했다.

그 차에는 공보관, 운전하는 군인, , 그리고 그 다음 날 내 일정을 동반할 한인 목사가 동승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를 둘러 보고 이어서 진주만이 내려다 보이는 해군 기지로 들어 섰다. 그 중간에 병사들의 내무반들을 지나면서 그 곳에서 17년 전 군 시절에 느꼈던 병사들의 땀, 음식 등에서 나온 냄새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은 이른 감이 있었지만 우리는 곧장 기지 내 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해군 장교 클럽의 식당에서 저녘을 먹게 되었다. 어느 사이에 어둠이 깔리면서 조명이 켜진 식탁에서 처음 먹어 보는 몽골리안 바비큐로 식사를 하는 중에 캄보 밴드가 연주를 하던 중에 우리 식탁으로 와서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뜻밖에 그 곡은 Happy Birthday to You, 였다. 공보관이 나에게 잔을 들어 권하면서, Happy Birth day to you. 할 때 까지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 줄을 몰랐다.

내 생일은 우리 식으로 표현 해서 양력 2 8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내 생일 상을 차리는 날은 10 3일이다.

나는 처음에 당황했으나, 곧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고, 그는 오늘 일정은 식사 이후 호텔로 가는 것 이외에 별 다른 것이 없으니 술을 좀 마시고 피로를 풀라고 권했다. 2 8일에 그렇게 훌륭한 생일상을 받아 본 것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Rear Admiral Lloyd R. 'Joe' Vasey 를 기리며,

19881월 초 부터 나는 미국 국무성의 International Visitor Program 에 의해 두달째 미국을 방문하면서 한-미관계 및 북한 등에 대한 의견교환 및 협력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미 의회, 국무부, Heritage 재단, 등 연구소, 그리고 대학 등을 돌아 보고 있었다.

하바드에 들러서 엔칭스쿨을 둘러 본 후 점심을 교수식당에서 먹게 되었고, 공보관의 소개로 알게된 교수들은 나에게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것은 내가 Paris 대학에서 학위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북한관계 부서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었다. 점심을 끝내고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커피를 뽑는 나를 그들은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그 다음날 일찍, 나는 보내준 차를 타고 시내를 들어가서 Pacific Forum 에 도착했다. 정문을 들어 서면서 나를 향해 웃으면서 다가 오는 건장하고 쾌활해 보이는 노 신사를 만났고 악수를 나누었다. Pacific Forum 의 창설자이며, 당시에는 사무총장의 역활을 하고 있었던 Vasey 제독을 만난 것은 나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Vasey 제독은 2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특히 태평양 전쟁에서는 그 막바지에 잠수함 함장으로서 일본 근해에서 일본 군함을 격침시키는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1975 Pacific Forum 의 창설 때 부터 3 101세로 타계할 때 꺄지 故 매케인 상원 의원이 추도한 그대로 그는 애국주의의 상징이었다.

그가Pacific Forum 을 창설할 때 내세운 것은 첫째는 태평양 전쟁의 전적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과  다른 하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위한 Forum 을 만들기 위한 것이 었다.

그 날 오전에 Vasey 제독은 Pacific Forum 에 대한 대체적인 설명과 사업들에 대해 말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나를 Pacific Forum Research Council Member 로 올려 주었다. 오후에도 나는 그 곳 자료실에서 자료를 본 후 그와 작별을 하였는데 그는 나에게 공동 학술회의에 관한 제의를 하기도 하였다.

다음날 나는 CINCPAC 을 방문해 군사안보 전략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고, 이에 대해 내가 브리핑에 대한 불만을 보이자 그들은 다시 그 옆 방으로 옮겨 당시 소련을 상대로 하는 미-쏘 간의 전략적 대결, 그리고 이미 국무성에서 브리핑 받았던 미-쏘 전략회담에서의 지역 문제로 논의되는 한반도와 관련된 전략을 다시 브리핑을 받았다. 그 때 나는 울라디보스토크 에서 캄차카 지역에 이르는 소련 해군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 다음날 귀국한 후에 나는 이 방문을 통해 마련된 여러 기회를 연구와 관련, 이용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여건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귀국 이틀 후 나는 병 중인 부친을 방문했고, 신학기를 맞는 대학 일정으로 정신이 없던 중에 설날 아침에 나는 큰 형님으로 부터 부친의  타계 소식을 전해 들었다.

더군다나 신 학기 개강후 얼마 후에 시작된 학내 분규로 대학은 질서를 잃고 혼란이 가중되면서 대학 분규는 악화되었다. 이 학내 분규를 수습하기 위해 새로운 교무위원 팀이 구성되었고, 내가 사회과학 대학장의 중임을 맡게 되어 그후 부터는 외부와의 연구협력의 문제는 진전시킬 수 없었다.

Pacific Forum 의 변화

Pacific Forum 은 중동 전쟁, 중국의 부상 등을 배경으로 미국 본토의 CSIS 와 통합되었고, 더구나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의 방일시에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문제로 찬반의 논의가 있었고, 여기서 Vasey 제독은 오바마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 및 그 희생자에게 화환을 바치는 것에 대해 일본의 요구가 미국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강력히게 반발하였다.

그후Pacific Forum 도 그 전략적 연구의 대상지역이 Asia-Pacific 에서 Indo-Pacific 으로 확대되면서 그 지도부에 Richard Armitage, Joseph Nye, 1990년대2000년 초에 미-일 동맹의 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2001 10월에 연구를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였다가, Vasey 제독과 오찬 약속이 되어  Pacific Forum 을 들어 서면서 사무총장을 기다리는 중에 뜻밖에도 James Kelly,- 그 즈음에 동아태 차관보로 임명된- 를 만났다. 그 때 Vasey 제독은 80세를 넘어가는 나이였고, 건강은 좋아 보였으나 성대가 악화되어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는 그 동안 Pacific Forum 에서 보내주는 자료들로 매 해 국제 관계의Article 들을 작성해 발표 할수 있었다. 그 자료 중에는 미-일 간에 대외비로 열린 정책협의회에 관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일 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이런 협의회가 자주 열렸다.

최근에 들어 미-일 간에 중국을 대상으로 한 Indo-Pacific 으로 확대된 전략회의가 열리면서 한국이 소외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도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 후 나는 Vasey 제독과 E-mail로 글을 주고 받았으나, 그 부인이 먼저 타계하여 그나마도 여의치 못하여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었다가, 그의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와이키키 해변으로 가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낙조를 즐겼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가 몇년 전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글을 썼고, 그 글에서 또 하나의 마샬 플랜을 제안한 것을 보면서 그와 충분히 의견을 교환 할 수 없었던 것이 매우 아쉬웠다.

이제 나도 74세의 생일을 넘기면서 조용히 그의 명복을 빌고 싶다.

PS: 하와이에서 나의 에스코터로 짚차에 동승했던 한인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겠다. 그는 그 다음날 나에게 입으라고 하와이안 셔츠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그 더운 날씨에 정장을 하고 내 일정을 끝냈다. 그는 내 모습이 안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일정이 끝나고 헤어질 적에 그는 나에게 그런 차림을 하고 Pacific Forum, CINCPAC 등을 드나드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을 해주었다. 특히 그는 내가 미-소간의 전략 브리핑을 해 주던 해군 중령과 주고 받는 내용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70세를 넘어선 나이로 보이는 그 목사가 자기가 미국에 온것이 일제하였기 때문에, 자기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느닷없이 나오는 질문을 입 속에서 삼키느라고 애를 썼다.: 그 국적을 왜 바꾸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