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5-29 15:50
가설 : 21세기 초반의 한국 정치는 “進步” 가 大勢 다 ( ? )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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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 21세기 초반의 한국 정치는 “進步” 가 大勢 다 ( ? )

지난 해 12월 7일 국회에서의 가결로 탄핵이 시작될 때 우려했던 경제에의 영향이 예상보다 적었고, 오히려 2017년 1분기 경제 동향의 발표를 보면, 경제 성장율에서 0.9%를 기록하여 예상을 뛰어 넘었으며, 대외 수출에서도 1323억 $를 기록하여, 작년 동기 대비 14.9%를 넘는 증가를 보였다. 중국의 사드 보복 여파에도 불구하고 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가 주역을 이루며 이룩한 이 결과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탄핵 시작한지 92일 만에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의 판결 ( 3월 10일 )로 끝을 낸 것도 이러한 경제적 순항의 과정에 큰 힘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탄핵의 소추 내용의 신속하고 합치된 인용으로 결론을 내게 된 배경에는 국민들의 줄기차고 단합된 민주적 여망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겠다. 이 국민들의 여망은 절차적인 단계로 대통령의 선출을 거치게 되었고 이 선거의 과정은 이제까지 진행되어 온 정치적 흐름을 최종적으로 평가하는 시험 석 이기도 하였다.

대통령 선출의 역동성
탄핵이 시작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 5월 9일 까지 약 150일 간을 한국은 국내 정치는 물론 대외관계에서도 수렁에 빠진 상태처럼 버둥거리기만 하였다. 중국의 사드 보복 공격, 트럼프의 사드를 둘러싼 착잡한 언행과 북한에 대한 정책에서의 혼선을 가져온 발언, 그리고 일본의 위안부 문제를 위요한 압박적 요구 등은 지도자의 중심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 시간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파면 결정 이후에 시작된 60여일 간의 선거 운동 기간에 후보들 간에 있었던 정책 토론도 국민의 목마름을 채워 주기에는 미흡했다.
5월 10일 진보적 정당을 표방하는 문제인 대통령의 선출이 확정되고 그 후 일주일 간에 일어난 일들은 그러나 이러한 암울한 정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통령이 되고 난지 7일 만 – 어느 진보적 언론은 ‘ 서둘러 ‘ 라는 표현을 썼으나,- 에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와 합참을 방문하였다. 국방부와 합참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문 대통령은 “ 정권은 유한해도 우리가 사는 한 조국은 영원하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군의 국방 태세는 한 순간도 이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고 말했다. ( 조선일보, 2017년 5월 17일 )
그러나 TV 를 통해 이를 지켜본 국민들은 더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문대통령은 이 말을 끝 낸 후 그 자리에 참석한 국방부, 합참 요원들에게 동의를 요구했고,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예” 하고 호응하였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유감 없는 직권이자 명령권을 행사한 장면이었고, 무엇보다도 남자다움이 그 기백으로 모두를 감동시키는 장면이었다.
문 정부는 5월10일 대통령 선거공약 1호였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고 대통령이 그 위원장으로 되어 일자리 81만개를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고, 24일 일자리 창출 정책 상황판을 집무실에 설치하고 24일 이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에 이어서 문 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합참을 방문하여, 북한의 핵을 비롯한 군사력에 대응하는 핵심 군사력을 확보하고 한-미 연합사의 방어태세를 완비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선거 기간 중에 계속 제기되었던 안보개념의 모호성에 대해 문 대통령은 이번 국방,합참의 방문을 통해 그에 대한 안보 우려는 완전히 해소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밝힌 "정권은 유한하지만 조국은 영원한 것이라는" 언급은 여느 보수 정당의 안보개념 보다도 더 강력한 국방 안보에 대한 국민의 통합적, 구심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집권 10일이 지난 후에 조사된 여론조사에서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그 소속 정당 ( 민주당 )의 지지율이 51% 였던 것에 비해, 이를 훨씬 능가하는 88%를 기록한 것 ( 한국 갤럽, 5월 26일 )은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지지율은 집권 1년차 2, 3 분기 의 종전 최고 기록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의 83%를 깨트린 지지였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대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은 51.55%: 48.02 %로, 57만표의 차이였다.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문제인 후보의 선거 전략은 출발에서부터 일자리창출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른 후보를 압도하였다. 말하자면 준비된 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보수정당의 패배,
19대 대선은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하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대통령 궐위에 의한 ( 따른 ) 보궐선거로 치뤄졌다. 헌재의 결정에 이어 3월 15일 국무회의는 대통령 선거일을 5월 9일로 결정하였고, 4월 15-16 양일간에 후보 등록이 있은 후 4월 17일부터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 민주화 이후 8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12명이 출마한 이래 가장 많은 15명의 후보자가 출마한 19대 대선은 정치적 상황의 여파로 투표율도 77.2% 로 비교적 높았다. 15명의 후보 가운데 비교적 지명도가 높았던 후보를 중심으로 득표전이 벌어 졌으나, 이미 민주당내에서 벌어졌던 경선 과정이 보였던 열기와 경합적 성격은 볼 수 없었다. 대선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문재인 후보는 1위 자리를 유지하는 인상적인 유세를 벌여왔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런 토론에서 장기적 정책애 대한 논의,- 특히 저출산, 장기적 인구문제- 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아주 유감이다.

이미 3월8일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는 일자리창출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슴을 밝혀 왔다. 반면 이에 대응하는 보수정당 ( 들 ) 은 탄핵에 대한 태도에서 우유부단한 것은 제쳐놓고라도, 自中之亂, 支離滅裂 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지만 보수정당에서 대선에 가장 앞섰던 홍준표 후보는 3월 18일에야 대선에 나설 것을 공식화했고, 같은 보수 정당의 유승민 후보와의 통합 논의가 큰 의미를 낳지 못하고, 단지 국가 안보문제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모호한 입장으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았으나, 전세를 역전할 만한 모티브나 상황을 연출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의 승리의 요인은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명확한 답을 하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요인이 복합적 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더 국민의 여망을 충족시켰다고 보는 가? 아니면 보수 정당이 정당으로서의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서 인가?
그 답은 각 후보가 획득한 지지율에서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선자안 문재인 후보가 41.1%, 차점자인 홍준표 후보가 24% 를 획득했다. 우선 문재인 후보가 획득한 지지율은 김영삼 ( 42% ), 노무현 ( 48.9% ), 이명박 (48.7% ) 박근혜 ( 51.6% ) 당선자들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했다.
이것은 문재인 후보가 경남-북,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를 기록한 것을 감안할 때, 전체 국민들( 특히 보수층 )에게 선명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예를 들면 안보에 대한 인식의 문제 –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문제인 후보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홍준표 후보가 이러한 보수층의 결집된 지지를 받기에는 보수정당이 주는 실망감, 기대되는 변화된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점, 그리고 구심점없이 표류하는 모습 등이 너무 오래 잔영을 남기고 있었다.

홍 후보가 차점자로 받은 24% 지지율은 역대 대선 차점자들이 받은 지지율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이었고, 따라서 역대 대선 기록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유추해서 보자면, 보수 정당은 다음 대선 ( 20대 )에서도 이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예상은 대통령 경선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당내의 토론과정, 전국적인 득표의 획득, 4강 파견 특사들의 활약 등 이 주는 효과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90%로 육박하는 등에서 충분히 예상될 수 있으며, 반면 보수당은 탈피해야 할 부패, 무능적 현상, 국민의 지지가 아닌 국민의 가치를 정당의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과 실천력의 부재, 보수 정당의 면목을 일신할 쇄신적 조직으로의 변화 및 그 주창자들의 결여 등에서 당분간 국민의 포괄적 지지를 이끌어 내기는 힘들 것 같다..

보수 정당의 과업
누구를 보수라고 칭하는가?  어느 한 사회만을 놓고 말할 때 에도 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층은 교육, 생활 정도, 등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 George Nash 가 간결하게 정리한 것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통, 자유 시장, 그리고 반-공산주의 에 대한 동의를 매개로 하고 있다. 또 도덕적 철학적 기반을 두고 말하자면, 이들 ( 서양 )은 강한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윤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무작정 한국 사회에 적용시킬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들 보수 세력들은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Glen A.Sproviero 는 보수주의자들이 그 도덕적, 정신적인 덕목을 교양하는데 우선적 관심을 두어야 하며, 관용적인 사회질서는, 개인이 자연법에 순응하며, 더 높은 권위 ( 종교적 ) 의 의사에 복종하려는 욕구에 의해 행동하려고 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리분별있는 변화룰 추앙하던 이들 보수주의자들이 고마워 할 줄 모르는 반대론자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부유함, 권력자, 엘리트 들의 좁고 편협한 이익만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반대론자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이른바 순수한 보수주의는 정치적 완성의 개념을 거부한다. 이들은 질서가 시민사회의 첫째가는 필요물이지만, 정치이론은 빈껍질의 사기물이라고 하면서, 정치적 완성은 순진한 선행자, 기회주의자, 그리고 정부의 돈을 분배 받아 자신의 지위를 사는데 아낌엾이 돈을 퍼붓는 정치인들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
이제 패배를 당하고 난 후 보수주의자들은,그들의 정신적 원칙을 재 검토하고 재 설정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 단순히 유권자들을 사로 잡기 위해서 이념적 분노를 표하거나, 최근의 이들 진보주의자들의 승리를 몰아 부쳐서 똑 같은 실수를 범하도록 추궁하는 것도 좋은 의미의 보수적 태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또 다른 이념으로 대체할 것을 찾는 것도 의미있는 이득이 되지는 못한다.

21세기에 들어 한국 정치의 색다른 모습은 이념적 정당의 선택이 무분별 하거나 자유분방하여 졌다는 것이다. 보수 정당에서 진보정당으로, 또 그 반대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정권을 노리는 행태들, 또 부분적으로 이런 행태가 보상을 받았던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념을 내세운 정당들의 경쟁은 그것이 좌든 우든 간에, 이념에 의해 그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전쟁은 한편으로는 이념과 또 다른 편으로는 명백한 사리분별 ( prudence ) 간의 싸움인 것이다.
정치적 보수주의는 융통성없는 특정적 정책 목표에 억매이지 말아야 한다. 이곳은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적인 문제를 전통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사회 중간적 제도들, 곧 사회조직, 교회, 상업조직, 가족을 비롯한 사적 조직들을 유지하려고 하는 곳이다. 건강한 보수주의는 단순화에 의해 세뇌당하거나, 극단주의지들에 의해 위협받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위해 싸우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에서의 질서가 공동체에서의 질서보다 앞서는 곳이다.
잘사는 동네에서 나오는 혐오시설에 대한 반대, Not in My Back Yard 와 같은 편협한 견해가 지배하는 사회, 지역주민과 국회의원간의 담합, 그의 공적 문제에서의 판단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이런 것들과 결부되어 주저없이 거부되는 모습들, 이것들이 정신적, 정치적 완성을 거부하는 것들이다.
  
Clyde Wilson 교수는 현대 사회에서 보수적 지식인들이 사회현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식인들의 사회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데, 먼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사회는 보수층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지만 이들 중에는 극단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있고 다수 보수 층은 승리를 위해 이를 받아 들이고 있으나 이들은 기회주의적 배반을 노리고 있다.
다른 하나는 1960년대 까지 미국의 사회적 구성은 단단했으나, 역사는 변화를 가져와 사회적 구성의 해체와 같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 사회의 구성적 요소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은 문명이 이룬 업적을 유지, 전달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나 보수는 단지 과거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나가는 입장에서 그의 기능은 문명의 정수를 이해, 적응, 유지, 전달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파괴되거나, 무력하게 되거나 신축성을 상실하고 무관심에 의해 방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주의자라고 해서 일반적인 전통주의가 아니고, 진정한 전통주의자는 특정적 전통을 보유했을 때 가능하다. 그 특정성에는 종교, 가족 등 그리고 책임 있는 사고의 자유와 같은 것을 갖춘 최고의 윤리적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Wilson 교수는 오늘날 이런 것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제재가 약화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보수적 지식인들의 과업은, 한층 더 시급성이 강조되면서, 단순히 정치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어받고 또 전해 주어야 하는, 평등보다도 더 높은 삶의 기준, 선한 사랑의 삶,에 필요한 지혜를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 Wilson 의 지적이다.

結語
한국의 종교적 프리즘은 다양하다. 개신교 22,5%, 불교 22.1%, 천주교 10.1%, 기타 0.5%, 비종교인 44.9%, 이러한 풍토에서 미국처럼 기독교적 윤리에 합의적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적 가치의 보편적 확산을 무작정 옮겨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의 전통적 가치의 기반은 자연법적 질서, 윤리에 둔 “양심”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찾아 볼 수 있다. 근대적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는 데서 그 핵심인 공동선 ( Common Good ) 은 개인의 양심에서 출발한다. 근대적 합리주의에 완전한 조건의 충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더 이상의 사회적 분열이나 혼란을 방치할 수 없는 긴급함을 인정한다면, 이제 이 기준으로 사회를 평정화 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 지식인들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지식인들이 단지 실망만을 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각 지역별 사회 정책적 학습을 이루어 지도록 지역사회에의 기여를 높여야 할 것이다.
패배는 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 하거나 탐욕성을 보인다던가 하기 보다는 보수 필부들에 대한 사회정책적 학습을 통해 서서히 변화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쓸모없는 센티멘탈리즘, 근거없는 로멘티시즘에 빠져서 현실에 눈감고 내부적 안일함에 빠지려는 보수를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정치적 형성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근대주의도 충분히 이루지 못한 상태인데, 서구에서는 근대주의는 끝났는가 ? 가 주요 논제라고 한다. 이에 대해 Peter Lawler 는 인간 존재의 동경이 만족되지 않은 이상 근대주의는 끝난 것이 아니고 더 이상의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 세계의 특징은 인간 존재에 대한 정의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런 정의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인간 존재의 개인의 추상화를 계속 추구하는데 반해 보수주의자들은 인간 존재를 정신과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고 사회 시민으로서 나라에의 탈이기적 기여, 가족과 분리할 수 없는 사랑의 책임, 등을 강조하고 있다.
1984년에 작고한 프랑스의 Raymond Aron 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성장하면서 겪은 1,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이루게 한 “그의 조국에 대한 열정 ( Passion )” 의 배경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가물가물 잊혀져 가던 “ 조국” 이란 단어를 진보적 대통령의 말을 통해 다시 들어보는 기분은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