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inger 와 한반도
1960년대 말 닉슨 행정부에 “아시아는 아시아 인에게” 라는 표제로 월남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고 당시 중공과 화해 ( Rapprochement ) 정책을 천명한 것이 Henry Kissinger 국무장관이다. Nixon 의 연설에도 나오지만, “분노에 찬 오랫동안의 고립상태” 를 풀어주고 중공과 화해를 가져오려는 시도는 유엔 등에서 강화되는 중-쏘의 협력관계를 저지하고 미-중, 미-쏘 관계를 중-쏘의 관계보다 더 중심에 두려는, 미-중-쏘의 삼각관계에 세력균형의 이론을 적용하여 미국에 유리한 세력관계를 형성하도록 한다는 것이 그 정책의 핵심이다. 따라서 Kissinger 는 미-쏘 관계에서도 이른바 “ 데땅뜨 “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쏘련과의 군사적, 안정적 관계를 설정하였다.
Kissinger 의 미-중공 정책은 그 화해의 과정에서 쌍방의 신뢰를 증명하려는 단계로 한반도의 안정적 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남-북 대화를 각 각 한국과 북한에게 추진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은 미-중 관계의 진전을 가져오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번 이용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안정적 상황은, 따라서 남-북한 관계의 안정은 미-중 관계의 안정적 발전의 필수적 요인으로 간주되었고 한반도의 긴장 완화, 통일의 문제 등은 주로 4자회담을 통한 해결의 문제로 제시되었다.
Kissinger 는 현실주의자 이다. 그의 현실주의적 태도는 유럽의 협력체제 ( Concert of Europe ) 를 설명하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프랑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1815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공화국 체제를 무너트리고 다시 군주체제를 회복하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Metternich 를 극구 칭찬하면서, 이른바 비엔나 체제는 1914년 1차 대전의 발발시까지 거의 100여년을 전쟁없는 평화를 유지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어뗜 역사학자들은 이 비엔나체제가 당시로서는 보수적인 군주제로의 복귀를 선언한 것을 들어 비판하고 있으나, 그의 평가는 이 체제가 유럽의 질서를 회복, 평화를 유지하는 데서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보고 있었다.
Kissinger 가 중공과의 화해를 추구한 것은 60년대 말, 70년대 초 유엔을 상대로 비동맹국들과의 관계, 그리고 소련의 협조를 통해 유엔에서의 중국 대표권을 획득하려는 중공의 끈질긴 노력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한-미 무역 관계를 통한 압력, 그리고 중공은 북한 국경에서의 무력 시위를 통한 압력으로 각 각 남-북 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의 상황
지난 12월 2일, South China Morning Post 는 중국의 시진평과 Kissinger 의 회담에 관한 보도를 했다. 우선 이 신문은 Kissinger 의 중국 방문 목적을 미국의 권력 변화기에 안정을 부여하고 Trump 에 대한 중국의 명확한 이해를 돕도록 하고, 반면에 시진평으로서는 Kissinger 로 하여금 미-중 관계가 긍정적으로 유지 되도록 Trump 에게, 중국의 관심과 더불어, 전달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Kissinger 는 방중 직전에 있었던 Zakaria 와의 CNN 대담에서 밝힌 바와 같이 Trump 가 선거 기간 중 언급했던 것,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한 45% 수입 관세 부과, 그리고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공격한 것 등, 을 모두 중국에게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Kissinger 는 시진평과의 회담 2주전에 New York 에서 Trump 와 만났고, 여기에서 주로 중국과의 관계가 대화의 내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Kissinger 는 지난 5월에도 Trump 와 회담을 가진 바 있고, Kissinger 는 Trump 가 어느 특정 집단에게도 의무를 지지않는 독특한 입장에서 자신의 전략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주목할 것은 Kissinger 의 중국 방문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시진평과의 회담이 끝난 후 중국 공산당 서열 6위인 Wang Qishan 과도 만남을 가졌다. Wang 은 중공당 내에서,재정 전문가로 알려져 있고, 또한 반부패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11년 6월 부총리로 북한을 방문하여 압록강 섬의 황금평산업단지 개발에 합의하였고, 그 다음 해인 2012년 6월에는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한반도 전문가 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돌아온 Kissinger 는 다시 Trump 와 12월 6일 회담을 가졌다.
그 만남의 주제 내용 중에는 공산주의 독재체제와의 무역, 외교 등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The New American, 7. Dec. 2016 )
최근 북한의 ICBM 의 발사 임박에 관한 발표에 대해 보인 Trump 의 반응은 북한 핵에 대한 어느 정두의 파악이 끝난 상태 임을 말해 주고 있다.
Trump 의 과거 경력에 비추어 볼 때, 사업가 출신의 대통령들이 보인 공통의 반응, 특히 북한과 같은 핵 위협과 긴장의 연속 속에서 대응하는 방법은 오히려 협상적인 태도가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Bush 대통령 집권시 Kelly 차관보를 특사로 보낸 경우를 들 수 있다.
Kissinger 의 대 중국 관계에서 보이는 특징은 중국과의 무력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지론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협상적인 태도를 대중 관계에서 대립적으로 바꿀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려는 의사는 Kissinger 와의 세번에 걸친 대화에서 확인될 수 있는 사항이다.
중국은 미-북한 간의 회담을 권유해 왔던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언론들의 보도 내용은 각 언론사들의 취사 선택에 달렸다고 보아야 하는 가? 1월 14일 어느 국내 신문은 Mattis 미 국방장관 내정자의 상원에서의 증언과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면서, 그 표제로 북한의 심각한 위협을 들면서 "군사적 대응도 선택지 중 하나" 라고 제시했다. 이러한 Mattis의 반응은 어느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나왔다.
그러나 Mattis가 강조한 것은 우선 북한과의 관계가 핵무기와 미사일문제를 둘러싸고 교착상태 ( Impasse ) 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과 그 지역국가들의 공동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미 국무부와 같이 협상 자세를 돌아보고, 북한에 대한 "조심스런 접근 ( Cautious Approach )" 을 제시 했다. Asia Sentinel 의 Donald Kirk 기자는 Mattis 가 Ash Carter 의 입장, 주로 제2의 한국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것, 북한과의 새로운 대화,- Carter 는 6자회담의 전망을 부인했다.- 를 필요로 한다는 입장을 승계하는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