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18 15:45
명기에게, ( 답글 )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206  
명기에게,

언젠가 우리가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잠간이나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또 우리 둘 사이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 하든 간에, 그것으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이 글을 부친다.

우리가 나온 대학을 이른바 ‘Liberal’ 하다고 하는 수식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듯이, 그 Liberal 한 분위기에서 4년을 보냈고, 각자의 차이는 있을망정,
나름대로 자기는 그것이 풍기는 의미를 ‘체취’로 간직하고 살아 왔다고
자부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문리대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쯤, 문리대 동문 중의 한 사람이 군 복무 중
에 연인이 보낸 편지를 그 내무반의 선임 하사가 공개해 놀림을 당하자 격분한 끝에
그를 총으로 쏘았고, 그 동문은 끝내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때나마, liberal 하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어느 조직에서든 외톨이가 되어 버리는 변명의 또 다른 표현처럼 생각되어
특히 대규모 조직에의 가담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된 적이 있었다.

이 ‘liberal’ 이란 단어 자체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이해나 그 단어의 사용에서 획일적이거나 모범적인 답안이 있는 것이 아닌, 그야 말로 그 것의 의미도 libral 하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tautology 의 유희에 놀아 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를 만들어 유포시킨 유럽의 사회는 그 단어의 개인적인 liberal 한 의미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기본에서 사회의 문화를 꽃 피웠고, 그 liberal 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에서 개인의 liberal 함이 폭 넓게 수용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사회 전체에 주는 영향에서 사회에 부정적이거나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을 형성하도록 했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 두 개념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으로, 서구에서의 개인주의는 그 사회에 대해 무엇보다도 귄리로서의 자유를 주장하고 그것을 쟁취해 온 것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 것은 동시에 개인의 책임과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의 Tolerance 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寬容, 마지막에는 자유 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이것은 그 판단의 준거를 사회에 두기 보다는, 따라서 그 판단을 권력자가 사회의 이름으로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중심을 개인에게 맡기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 이성적, 또는 합리적 이라는 의미가 중요한 것은 비록 개인의 판단에 중점을 두기는 하지만 그것은 방종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의 합리적 판단, 그 것을 거슬러 올라 가면 결국 개인의 양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가 오랬동안 영향을 주었던 이들 나라에서 사회가 어느 정도의 관용성을 보이고 있는 가 하는 것이 정치학자들 - 특히 정치문화 에 중점을 둔 -의 관심이 되어 왔지만, 그 중심을 개인에게 두고 보면 그 사회의 관용성은 당연히 확대될 수 밖에 없다.

이 들 나라에도 한때 전체주의가 지배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이 전체주의적 지배하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 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을 일으키면서 전체주의 지배 이후의 사회적 안정을 위한 조치가 마련되었다.

내가 겪은 것 중에 하나는 프랑스에서 쓰고 있는 이른바 'Anciens Combattants' 이라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이 것은 재향군인을 뜻하는 말이지만, 특히 2차대전 중 독일의 지배 하에서 저항운동을 한 Resistance 들에 대한 사회적 조치에서 특권적인 관용의 대상이 되었다.
교수들 중에서도 위의 표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들에 대한 불평이 있기도 했지만 사회적으로 이것은 그대로 유지되어왔다.

나치즘의 지배 하에서 협력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그 사회에서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고려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나치즘은 그 본 고장인 독일에서도 정권의 장악에 성공한 것에서부터 따져 보아도 그 지배 기간은 10년 가량된 것으로 알고 있다.( 1933년 집권 )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 기간은 1939-1945으로 약 5년간이라고 하나 실제 기간은 이보다 짧다. 또 어떤 사람은 프랑스에서 나치 지배 후 전범자로 약 3만명이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과 반면 일제 지배 후에 한국에서 처벌 받은 숫자가 4,000여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비하면서 그 부족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전범을 처단한 사람이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거의 같은 세대, 또는 같은 시대의 사람들로 생생한 현실의 문제로 인식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지배 기간이 3-40년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기의 글을 보면서 모 윤숙 씨의 작품에 나타난 조국관 ( ? )과 그 실제 활동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 또는 해석해야 하는 가의 문제에 대해 나는 명기에게 단순하게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40여년을 그들 밑에서 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이미 1902년부터 외교 사절의 철수로 이미 자주 독립성을 상실했었다.

비교될만한 사실로서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 ( 1857-1947 )였던 인도는 1885년부터 영국의 자치적 후견주의에 의해 인도국민의회가 창설되었고, 이미 1900년부터 하계 올림픽에 인도의 이름으로 참가 했으며, 1차 대전 참전 이후 국제연맹의 창설에 참석하고 있었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은 군국주의의 형태로 아시아 지배를 내세웠고, 영국과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내세웠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 한반도는 그 전쟁을 위한 인력, 물자의 조달 지역의 역할 만이 강조되었고, 만주, 중국 등지에서의 독립 운동과 더불어 해방, 독립은1940년 대에 들어 서면서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 때에, 곧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었던 일본은 한국인을 전쟁에 내몰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 했을까?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조선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각각 정-부사로 하여 일본을 보고 오도록 하였고 이 둘의 보고는 상반되게 제출되어 왜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되었다.
왜 두 상반된 보고 중 무방비적인 대책만 채택되게 되었는지도 따지고 보아야 할 문제지만
어쨌든 김성일은 왜의 침입 후 파직이 되었다. 그러나 왜의 침입 후 김 성일은 백의 종군하여 전쟁에 뛰어 들었고, 그 공을 인정 받아 다시 복직되었다. 결국 그는 전투에서 사망을 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잘못된 보고를 한 죄와 더불어 다시 전쟁에 뛰어든 改悛의 노력이 같이 평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할 때, 모윤숙 씨의 이글은 생도 교육을 위한 책에 수록되어 있었고, 출입구에도 이글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현판이 붙어 있었다.
이 글을 쓸 당시의 모윤숙 씨는 자기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철면피와 같은 감정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조국과 하늘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과 헌신해온 사람들에게 이제 이 글을 쓴 사람의 과거 행적만 들어서  배반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인가?

경제적인 발전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중국에서 얼마 전에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우리가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이룩하는 데서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사회적 관용의 크기를 더 넓히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