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0 12:03
어머니의 故鄕-어머니 날을 기리며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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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故鄕-어머니날을 기리며
김영식 | 2013·05·13 13:00 | VOTE : 7 |

정년을 하고 명예교수로 있으면서도 학교의 배려로 거의 2년을 더 연구실을 계속 쓰고 있다가 올 봄에 정리를 하고 지금의 명예교수실로 옮기게 되었다.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된 서류 봉투를 발견하고 그 내부를 열어 보니 그야말로 오래되서 퇴색된 낡은 “호적등본”이 있었다.
그 호적등본은 사실상 그 기재된 사람들-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터 우리 형제 6명 까지-이 사망 내지 퇴거 등으로 지워져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내가 마지막에 쓰게 되었던 연구실은 그 전에 가정학과 교수들이 쓰던 연구실로 내부나 문, 창문 들이 전부 한식으로 되어있어서 오후에 석양이 지면 창 쪽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운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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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면서 그 호적등본을 -무려 5장이나 되는 -차례차례 읽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자라면서도 외갓집이라는 말에 대해서 별로 느끼는 것이 없었고 또 실제로 어머니 친척은 그렇게 많지를 않았다, 그것도 말이 친척이지 촌수로 보아도 5촌 8촌 이 될 정도로 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래서 더욱 그들을 각별히 대하였고, 내가 중, 고생 이었을 때 명절이면 어머니 친척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기 위해 불광동에서부터 신당동까지 헤메고 다녀야 했다. 어머니는 토요일마다 교회( 제칠일 안식일 교회는 토요일에 예배를 본다, )를 다니셨는데 그 날은 어머니가 이 친척들을 방문하는 날 이었다.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부산 피난 시절 부터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우리는 지금의 동자동 ( 그 전에는 중구 도동이었지만 )에 살고 있었고, 한강 다리가 끊어진 후 지금의 양수리 쪽으로 가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지금의 용두리를 거쳐 남쪽으로 피난 가던 중 북한 군이 먼저 앞질러 갔다고 해서 우리는 안골 ( 지금은 고려대 연습림으로 되었다고 함 )이라는 골짜기로 동네 사람들과 같이 피신했다가 그 해 겨울에 다시 문경을 거쳐 선산으로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문경을 지나다가 큰형은 국군에 현지 징집을 당해 그 때부터 우리는 큰형의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부산에 도착해서 우리 가족은 공무원들의 집단 숙소 ( 동광동 )에 방을 하나 구해서 있게 되었고 이곳은 우리 친척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방 하나에 2,30명이 돌아 가면서 잠을 자는 숙소가 되어 버렸다. 그 해에 여고에 들어 갔던 누나와 어머니는 사과 상자를 들고 영도교 근처에서 생선을 팔러 다녔다.
부산에 온 후에 우리는 큰형이 중부전선의 모 연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중부 전선에 중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더구나 우리와 4촌이 되는 태식이 형이 육사 1기로 임관한 후 전쟁 초기에 대전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만나는 친척마다 붙잡고 울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국방부 건물 앞에 나붓는 전사자 명단을 보러 나갔고, 돌아 오는 길에 어머니는 교회에서 그 마음을 달래며 모습을 추스린 다음에 집으로 오셨는데, 그 때에 너무 고심을 한 탓인지 어머니는 예순을 넘어서자 말자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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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적등본을 보다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은 동갑이었던 두분이 13세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밑며느리 제도였다고도 보여지는 이 결혼은 그러나 큰 형님을 낳고서야 비로소 혼인 신고가 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느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고부 간의 관계를 주제로 한 드라마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그런 일 이 없었냐고 묻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왜 없었겠니“ 하시면서, 시집간 날의 얘기를 해 주셨다.
아버지가 형제 중에 제일 아래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감히 시어머니에게 말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그 관계가 엄했다는 것이다. 시집 간 날 어머니는 오전에 예를 치르고는 옷도 갈아 입을 사이도 없이 사과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고 시어머니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평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가 늘 쪽 머리에 한복을 입고 다니신 모습만 기억하고 있지만 단 한번 어머니가 머리를 풀고 앉아 계신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것은 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몇주 지난후 목욕을 한 상태에서 머리를 길게 처녀처럼 늘어 트리고 침대위에 앉아 계실 때였다. 내가 보던 어머니와는 다른 모습이었고 마치 그림을 보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 느낌은 아직 생생하다.
어머니의 어릴 때 이름은 탄실 이었다고 한다. 토실 토실하게 살이 찌고 귀엽게 생겨서 그 당시 그 지역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 들이 무척 귀여워 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 지금은 황해 북도 로 불리워 진다. ) 수안으로 산악 지역인 이곳은 금광이 유명했던 곳이며, 그래서 그런지 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인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는 독자로 손이 매우 귀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시집온지 2년 정도 지났을때 외할아버지는 병을 얻어 돌아 가셨고, 그 후 몇 년이 안되 외할머니는 재가를 하셨다고 한다.
그 때 당시 기술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전근될 때 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던 까닭에 어머니는 고향을 가 볼 수가 없었고, 그 소식을 전해 듣기만 했다. 당시에 외할머니는 완전히 그 관계를 끊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항상 차분한 모습을 하고 계셨고, 목소리를 높이신 적도 크게 웃으신 적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어머니가 내가 중학교 생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와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큰 형의 결혼을 앞두고 축하차 찾아온 오랜 친구와 아버지는 술잔을 나누면서 크게 웃으며 나중에는 일본 말로 둘이서만 재미있게 얘기를 주고 받은 후 헤어졌다.
어머니가 화를 낸 이유는 그 두 분이 일본말로 주고 받으며 웃었던 내용 중에 여자는 사흘마다 매를 들어야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 왔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다그쳤고 아버지가 용서를 구한 후에야 그 소란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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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이었던 아버지의 봉급으로 어머니는 아버지와 6형제를 혼자 감당해 내셨다. 비오는 날이면 우산이 일곱 개가 있어야 했고, 교통비와 학용품 비는 매일 아침의 소동의 원인이 되었으며, 당시 한 달에 쌀 한가마가 필수적인 식량으로 있어야 하는 대 가족이었다.
그 많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어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할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시절에 나는 새벽시간에 드디어 어머니와 둘이서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엌에서 비록 10여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어 주셨고, 그렇게 어머니와 얘기를 나눈 날은 하루 종일 피곤한 줄을 모를 정도로 기운이 넘쳤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그 해 늦 가을에 있었던 대학 지원을 결정하는 모의고사에서 나는 문과반의 수석을 했고 나는 그 사실을 새벽에 어머니에게만 말을 했고 그 때 어머니의 웃는 모습은 나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초등하교 때부터 내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어머니는 언제나 시장에서 떡을 사다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한번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장교 군사훈련을 끝내고 첫 면회가 있었던 날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셨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두분이 늦은 생일 축하차 유성 온천에 예약을 한 날이 되어서 오는 길에 아무런 준비없이 그 면회에 오셨던 것이다. 옆의 동료들은 통닭에다 불고기를 먹고 있는데, 우리 가족은 그것을 구경만 하게 된 것이다. 투덜거릴 사이도 없이 나는 얼른 주보로 달려가 마실 것과 빵을 사가지고 와서 두 분을 위로해 드렸다.
그 다음 날 나는 두분이 계신 호텔로 외출을 나와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서 분풀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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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암 수술을 끝 낸 후 퇴원하신 어머니는 지금의 진관사 부근에 살던 작은 형의 제의로 그곳에서 요양도 할 겸 거처를 옮겼다.
당시 군에 복무하고 있었던 나는 장교여서 출, 퇴근을 하고 있었으나 거리도 멀고 또 그렇게 자유롭지만은 않아서 일주일에 두 번 내지 주말에 한번 어머니를 찾아 뵈였다. 6개월이라고 단정하는 의사의 진단에 때로는 거부적인 생각도 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의 증세는 서서히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은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로 어머니는 끝까지 잘 견디고 있었다.
음력으로 같은 8월에 두분의 생일이 열흘 갼격으로 있었고 그 사이에 추석이 끼여 있었다. 어머니는 추석을 지내면서 친척들을 다 만나고 싶어 했고, 생일을 지내고 이틀 후에 돌아 가셨다. 돌아 가시기 일주일 전에 나는 어머니 옆에서 주말을 보냈고, 새벽에는 그 전처럼 둘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용변 처리를 하기위해 어머니를 부축하고 다시 자리에 누우셨을 때 어머니는 몸을 일으키면서 “ 너는 내가 죽을꺼라고 믿고 있지 않지”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의 반응을 보였고, 어머니는 “ 네가 나를 일으키면서, 투박하게 말을 던지는 것들이 그렇게 보인다”. “ 그렇다고 네가 눈물을 흘리는 궁상을 보이는 것도 더 보기가 않 좋지 않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일주일 후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하루 전, 새벽에 어머니는 나에게 “언제 또 오겠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주말에 오겠다고 말을 하고 출근을 했고 사관학교에 도착한지 한 시간 후에 나는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수업을 끝내고 도착을 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장지를 마련하기 위해 나섰고, 어머니의 교회 사람들이 주선하는 것에 따라 파주에 있는 기독교 묘지를 찾아 갔다. 묘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 경사도 높지않은 흙 길 언덕을 오르면서 아버지는 자꾸 헛 발을 디디면서 미끄러 지셨다.
이틀 후 장지를 향해 가는 버스가 사과 밭을 끼고 도는 코스모스가 줄 지어 있는 경사로를 지날 때 누나는 혼자 말처럼 “ 얘, 이 길을 언젠가 어머니와 같이 갔던 것 같지 않니? ” 라고 했다.
나는 그 낡은 호적등본을 잘 보관해 두고 있다. 언젠가 어머니의 고향을 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또 어쩌면 외할머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을 바라면서.
곽명기 어머니... 언제나 그립고,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 ...
13·05·19 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