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07 23:32
송계리의 봄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6,540  

송계리의 봄

지난 달 우크라이나에 관한 글을 홈 페이지에 올리고 난 후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 곧 이어서 시작되는 四旬 (Lent ) 시기를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3 2일의 재의 수요일 ( Ash Wednesday ) 미사에서 시작되는 사순 시기 동안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듯이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주님께 청하는 기도를 바치며. 참회와 회개를 통한 절제의 시기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카로부터 작은 형님의 부음을 전달 받은 것은 1 9일이었다. 겨울의 맹 추위 속에 코로나도 무섭게 몰아 치던 때에 웅크려 지내던 나에게 오랜만에 전해준 소식이었지만, 그 소식은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만 알려주는 침울한 것이었다. 췌장암으로 오래 고생하시다가 89세에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오형제 중에 내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주변에서 말하듯이 나는 작은 형과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특기는 달랐지만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것 까지 같은 길을 걸어 왔고, 그런 면에서 성격도 비슷한 데가 많았다. 5.16 직후 맥주를 생산하는 원료 효소를 만드는 공장을 지어 놓고는 기고 만장 했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송계리의 펜션

松溪 (? ), 내가 송계의 명칭을 한자로 적어본다. 이곳에 와서 첫날 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 새벽, 어둑한 시간에 뒤쪽 문을 열어 제치자 쏟아 들어온 내음새, 짙은 솔나무 내음새가 나와 내방을 감아 들었다. 뒷 문은 그대로 월악산 중턱을 향하고 있어서 찬 새벽 공기와 더불어 그 공기를 달다고 해야 할 정도로 내 몸을 살려 주는 느낌을 주었다.

이 펜션을 알게 된 것은 대학 동창회보에 실린 광고를 통해서 였다. 우선은 비수기라고 해서 가격이 싼 것도 마음이 들었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수안보 온천이 있었고, 또 카돌릭 성지로 알려졌던 연풍 성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송계리는 행정 구역 상으로는 제천시 한수면 에 속해 있어서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제천시에서 연결된 교통을 이용해야 하지만. 내가 소개받은 내용은 제천시가 아닌 충주 시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 송계리에 연결된 버스 로선은 제천 보다는 충주로 부터 오는 로선이 하루에 4번 들어오는 것으로 더 자주 오고 있었다.

우선 이 로선은 충주에서 수안보 온천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오면서 느끼기 시작한 것은 기다림의 미덕이다. 내가 명예퇴직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승용차는 지난 2007년 교환교수로 프랑스를 다녀온 이후 구입한 차량이었다. 그 이후 14년을 끌고 다니던 차량은 아직까지도 새 차나 다름없이 멀쩡한 것이었지만 내 자식 놈은 나에게 위험하다고 경고를 계속 주고 있었고, 나 자신도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차라 작년에 이제 대학에 들어간 조카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최근에 들어 장거리를 갈 때 마다 불편을 느끼고 있지만 그런대로 지내오고 있었다.

송계리에 내려오던 날 나는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예약을 해 아침 6 30분 고속 우등버스를 타고 충주로 향했다. 여행은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더 낭만적 출발의 격을 갖추는 기분을 살려 준다. 바쁘게 시간을 마추려는 설레임과 잡 생각을 버리고, 일정을 재촉하는 조급함이 더욱 이런 출발의 격조를 높혀 준다.

몇 년전 통영 가는 버스를 타보고는 두번 째 이기는 하지만, 고속 우등 버스는 그렇게 이른 시간인데도 8명의 승객을 태우고 정시에 출발했다. 물론 내가 최고령자라고 해서 기사 아저씨의 바로 뒷 좌석을 차지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당당한 체구로 머리를 짧게 깍은 스타일로 말 수는 많지 않았으나, 아주 친절한 기사였다.

그가 말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은 성격 탓 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나에게 확인해 준 것은 도착시간이었고, 그는 두 시간 5분만에 정확하게 충주에 도착 했슴을 강조했다.

나이 탓인지, 아니면 시간을 지키기 위해 빨리 온 탓인지 도착할 때 쯤에는 약간의 멀미를 느꼈다.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으나 연계되는 버스 로선과 시간을 알아 보고는 터미날 내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부페 식이 있었으나, 나는 조금 조심하는 의미에서 따로 그 주인이 강조하는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그 김치찌개는 의외로 내 입맛에 맞는 좋은 첫 외식이 되었다. 커피까지 맛있게 먹고 나는 지방 시외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가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오전에 나가는 두 대는 이미 나갔고 오후 1시에 있는 버스를 타야 했다. 이제 기다림의 세상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늘 계곡 펜션

예약을 해놓았던 펜션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서 였다. 비수기인 만큼 사람이 별로 없는 관광지가 그렇듯이 쓸쓸한 거리의 모습이었다. 친절한 펜션 주인의 안내로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형식은 3층으로 되어 있었고 이층에는 커다란 베란다가 있어서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방을 정하고는 당장 허기를 채우는 문제가 대두되어 임시로 그 동네에 있는 마트로 가서 간략하게 먹을 것을 장만 했으나, 그 다음날 더 큰 마트로 가서 먹을 것을 사와야 할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충주로 나오는 버스를 타고 나와 롯데 마트에서 쌀, 김치, , 미역, 그리고 고기 등을 구입하고, 비상식량으로 라면을 마련해 놓았다. 생각 보다는 무게가 많이 나가는 관계로 애를 쓰기는 했으나, 들어 오는 길에 수안보에 들러, 온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꽤 오랜 만에 상록 온천에 들러 목욕을 하고 곧 바로 펜션으로 돌아와 저녘 준비를 하고 미역국을 끓여 혼자 저녘 식사를 했다. 저녘을 먹고는 동네 마실을 다니려 나가 보았다. 마을은 한수면 사무소가 있는 비교적 규모있는 크기였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까지 운동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 마을 한가운데에는 제법 큰 규모의 축구장까지 비록 인조 잔디 구장으로 되어 있었지만 좋은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송계리의 두번째 밤은 그 다음날 뒤에 있는 월악산을 오르기 위해 일찍 잠을 청하기로 했다. 월악산은 1,097m의 높이로 왕복 6 시간의 등반 시간을 요하는 비교적 높은 산이었다. 다른 등반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침 일찍이 일어나 아침을 먹고 김밥을 싸서 8시에 등반을 시작하였다.   

중반을 넘어 가면서 부분 부분 눈이 쌓여 있고, 또 얼음이 얼어 있어서 걸음 거리가 매우 어려웠다. 내려오기 직전에 싸간 김밥을 점심으로 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려오기가 더 어려운 것은 나이 탓으로만 하기에는 더 힘들게 느껴졌다. 여러 번 미끌어 넘어지면서 손목을 다치는 일도 있었지만 오후 3시가 넘어서 펜션에 도착했다.

Lent 의 의미

에수님이 부활하여 다시 승천하시는 시기까지의 40일을 사순시기 라고 하며, 이 시기는 부활을 더욱 의미있고 기쁘게 마지하기 위하여 이 시기를 의미있게 해주는 황야에서의 방황과 시험의 시련을 체험하면서 신도들은 참회와 회개의 시간을 보내도록 하고 있다.

매년 닥아오는 시기이지만 올해에는 더욱 집중을 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기 위해 이곳을 택한 의미도 있다. 이를 위해 나는 묵주 기도를 위한 책과 매일 미사 책 등을 가가지고 왔고, 수안보에 있는 성당과 연풍 성지를 찾았다. 오전에는 매일 미사를 이용하여 미사를 드리고, 밤 늦게는 묵주 기도를 하며 참회와 절제를 위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수안보 성당의 미사 시간을 맞추지 못해 두번이나 미사를 놓쳤고, 연풍 성지는 그 방문을 위해완전히 하루 시간을 다 보내는 일도 있었다. 우선 버스 로선을 확인하고 그 다음에 시간을 맞추는 일에 애를 먹었다. 특히 연풍성지는 버스 시간이 명확하지 않았고, 제때에 오지도 않았다.

마침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그 마을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또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 식당을 찾아 다녔고, 오히려 시간을 쫒아 다니는 내가 가련하게 보일 정도 였다. 옆에 있는 할머니가 이제 기다리리면 와유,” 하고 거드는 말을 할 정도였다. 여기에 와 있는 기간의 절반은 거의 비가 오거나 높은 습도를 보이는 날씨가 계속되었고, 그 계곡은 서울 지방 보다 2-3도가 낮은 날씨를 보였다.

될 수 있는 한 식사는 펜션에 돌아와 하기 위해 일정을 잡았고, 조금 먼 산의 등반은 김 밥을 싸서 들고 다녔다. 그리고 일주일의 한번 은 수안보에 나가 목욕을 했고, 그 지역의 별미라는 꿩 만두를 먹어 보았으나 그렇게 별미라는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수안보에서 유일한 중국집에서 먹은 짜장면에 더 미련을 가지게 만들었다.

산골짝이라서 그런지 하루는 짧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가져온 책을 보면서 보냈다. 또 다시 시사적인 글을 쓰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내가 볼 수 있는 자료로는 그렇게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이따금 펜션 주인의 호의로 그의 노트 북을 통해 나에게 온 이메일을 확인해 보기는 했으나 충분히 이용할 수는 없었다.  그 기간 동안에도 나에게 들어온 이메일은 매일 50통을 넘을 정도로 와 있어서 그 메일을 확인하는 데에도 2-3 시간이 걸렸다.

돌아 가신 형님의 생신이 3월 말일이라고 가족이 모인다는 연락이 와서 나는 예정보다 일찍 송계리를 떠나야만 했다.

어느 덧 3월 중순을 지나면서 산 중턱의 얼음이나 눈이 녹았고,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떠나는 날 아침 커다란 두루미가 계곡 위 쪽에서 날아와 개울물 주변의 바위 위에 앉아 사냥을 시작했다.

부활절 까지는 아직도 열흥 이상이 남아 있어서 기도와 절제의 생활을 계속 해야 할 것이고, 기쁜 부활절을 맞아 기쁘게 만나자는 조카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기다림도 또 하나의 생활이 되버린 느낌이다.

그 동안 카톨릭 평화 방송의 매일 미사 방송을 이용해 왔는데, 어느 날 그 미사 후원자의 명단에서 블라디미르 Putin 의 이름을 본 기억이 기억에 남는다. 그 며칠 후 우크라이나의 젤린스키의 이름도 그 후원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왜 한국 카톨릭 티브방송에서 이들이 평화를 강조하는 후원의 글을 올리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이러한 후원의 경쟁이 국제 정치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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