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1-28 17:36
새해에 받은 선물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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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받은 선물

 나이가 들어 가면서 새해를 맞는 기쁨은 나이와는 반대로 점점 줄어 들어가는 느낌이 완연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갖는 기대도 그렇게 크지도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해오던 버릇대로 어느 모임에 가서 젊은이들 에게 해줄 덕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습관처럼 되었다.

얼마 전부터 이런 덕담을 생각해 오던 중 머리에서 맴도는 것은 단지 젊은 친구들 뿐 아니라 나이가 제법들은 우리 동료들에게도 해 줄 수 있는 덕담을 고려하던 중 간결하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T. S. Eliot 의 싯 구절에서 쓴 “Redeem the Time, Redeem the Dream” 이 적절한 것으로 보였다.

이 구절은 T. S. Eliot 가 쓴 “ Ash Wednesday “ 에 나오는 것으로 그 뜻은 대강 짐작하고는 있으나, 좀 더 명확히 하고 싶어서 영문학을 전공한 누님에게 물어 보았다. 그 분은 80대 중반의 할머니로서 그 대답을 어떻게 할 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글을 보냈다.

누님은 처음에는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면서 보낸 답변에는시간을 아끼라는 말이 아닐 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는 – “ 하고 겸손의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내가 다시 글을 보내면서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요구하자 몇 시간 후에 보낸 답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너는 어떠한 모습이냐, 네가 만족하고 네가 바라던 모습이냐?, 그렇지 않다 해도 네 소원을 주님께 아뢰라, 소망을 주님께 두고 꿈을 꾸어라. 주님은 자비하시고 궁율하심 으로 그 꿈을, - 그 소망을 주님 뜻대로 이루시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 글 끝에 누님은 자신이 혼자 해석한 것이며, 그리고 주님 안에서 내 소망을 분명히 하기로 다짐 하였다는 것을 부기하면서, 그 글 끝에 로마서 8 28절 이라고 명기하였다.

 

의 수요일 ( Ash Wednesday )

Thomas. S. Eliot ( 1888-1965 ) 는 기독교의 신앙심이 강하게 작용하는 문학인으로 알려졌으며, 그를 평하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주로 두 개의 원천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면서 그 두 개를 하나는 단테의 작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들고 있는데, 오히려 그의 작품은 성경적인 것으로 충민해 있으며, 그의 신념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Redeem the Time, Redeem the Dream 아라는 구절은 3년간에 걸쳐 발표한 Ash Wednesday 에서 후렴처럼 사용하고 있는 데, 특히 두 번째의 글,  Redeem The unread vision in the higher dream,에서, 꿈에서 읽을 수 없는 비전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의 시에서 여러 번 나타나는unspoken, unheard word 와 같이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소망이나 꿈이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인내를 가지고 신을 사랑하고 신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되기를 바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재의 수요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인간이 준비하여 할 자세를 언급하는 예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4월의 부활을 축하하고 기뻐함은 물론이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과 마음 가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부활 40일 전에 해당되는 주일의 앞 수요일이 되는 2월의 수요일에 재를 만들어 이마에 표시를 하면서 四旬節을 시작하고, 이 기간의 생활을 悔改, 절제, 금식, 경건으로 지내면서 부활의 의미를 고양시키는 기쁨을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Jill Carattini T.S. Eliot   Ash Wednesday 에서 구원을 재와 종말의 주위를 움직이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하느님이 삶의 새로운 시작을 가져 오는 것은 확실한 종말 가운데 에서 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에서 나오는 파괴 중에서 매일의 새로운 아침을 매일의 똑같은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대로만 보려는 것만큼 그에게 파괴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Carattinni 는 말하고 있다.

"야훼의 변함없는 사랑은 그침이 없으며, 그의 자비는 종말이 없다. 그들은 매일 아침 새로우며, 나의 신실함만이 필요하다. 내 영혼이 하느님이 나의 부분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나는 하느님에게 소망을 건다. "

새로운 아침, 새로운 해에는 신이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날, 읽을 수 없는 비전에서 희망적인 것, 회복적인 것이 있으며, 여기 새로운 아침에 건 소망, 새로운 자비와 새로운 시작을 확신하는 것은 일정한 구원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소망과 꿈에서 하느님이 꿈 꾸는 사람들은, 세계를, 시간을 소중하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을 소모하게 하지 않게 하는 위대한 사랑이다.

 

Eliot의 보수성  

다가오는 새해를 보며 Eliot 가 꿈과 소망을 소중히 하면서 정신적 질서를 갖추며 풍요를 기대하도록 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통성과 기독교적 인도주의에 기반을 둔 것임을 미국의 보수주의의 원로인Russell Kirk 는 강조하고 있고, Eliot 를 단순히 시대적 경향을 쫒는 것이 아니라 도덕주의자, 국가주의자 로서 평가 받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인간을 善과 惡이 놀라을 정도로 혼합시킨 존재로 보면서 인간의 약점과 동시에 강점으로 보려는 사회에서 Eliot 는 기독교의 정당성과 정신적 사회적 질서의 회복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Eliot는 현대 문명의 병적 요소, 물질만능 주의, 대중의 일치성 만을 내세운 군중주의 로 부터의 탈출을 그의 작품에서 그리고 있다.

그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진보주의에 대한 치명적 약점을 예견하고 이에 대해 보수주의적 사고 방식, 고전적이고 기독교적 내용에서 형성된 정신에 바탕을 둔 지혜를 강화시켰다.,

그는 서구 사회가 향하고 있었던 도덕적 부패와 혼란에 대한 반대 테제로 그 시대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고전적 신학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경건함에 의해 고양된 시적이고, 궁극적으로 영웅적인 열정과 노력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찾아 볼 수 있다고 그의 평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식 자체의 나열보다는 인간이 보이는 지식탐구의 열정을 중요시했으며, 이 가운데에서 그는 자신의 노력을 역사적 발전의 맥락에서 위치를 설정하고자 하였고, 20세기의 삶의 성격, 그리고 자신의 생활 성격을 설명하고자 했고, 따라서 그는 오래된 긴 지적 전통의 다양성 속에 자기를 추가하고자 하였다.

그는 그와 그의 작품을 특정적 전통 속에 포함시키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 가운데 그가 주장하는 것은 그 전통을 과거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살아 있는 현실" 로 보았다.

그가 다른 작품들, 특히 과거의 작품을 언급한 것은 과거를 향한 제스츄어로 언급한 것이 아니고, 과거를 현재로 끌어 들이려는 방법의 하나로 언급하였다. 그는 현대 시대를 특정하면서 현실이 더 절망적이고 도시적 지옥의 형태로 진실을 밝히려고 하면서 이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변함없는 환경으로 보았다.

그는 현실을 더 절망적이라고 보았으나, 이것은 그가 현대가 그 생존을 위해 뿌리를 다시 찾고. 기독교적 신념과 같은 문명적 원천으로 돌아 가려는, 그 것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에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과거를 돌아 보나 그 먼 과거를 통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회귀적 패턴을, 곧 고통과 구원을 발견하고, 과거와 현재를 직선적 관계로 보지 않고, 과거- 현재의 무한적 시간성의 관념에서 연속성이 아닌 계속성의 관념에서 보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궁경은 환경으로서 본질적인 변화가 없는 것이며, 시간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그 속에서 충만하게 살려고 부단히 움직이며 시간을 지배하고 낭비하려 하지 얺는 다는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종합이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피하게 기독교적인 것으로 귀의하게 하였으며, 여기서 전통적인 것은 미래에도 투영되는 모습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Eliot의 과거와 전통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으,, Kirk는 이를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전통을 가진 사람들의 인식에서 선과 악의 분별은 뚜렷하며, 선은 곧 하느님과 연결된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이런 선과 악의 분별은 良心 과 관계된다. 이 良 은 어질고, 착할 良 으로, 양심은 이미 善을 추구하는 마음 가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도덕적 가치의 판단을 내리는 정신적 능력, 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새해의 과제와 미지의 두려움

2020년으로 들어 서면서 첫 이틀은 조용했으나, 1 3일 미국은 드론으로 바그다드에 도착하던 이란의 민병사령관 Qassem Sulemani 를 폭사시키는 공격을 감행해 이란의 분노를 폭발케 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상황은 반전되고 양국 관계는 소강상태에 들어 갔다.

새해를 들어가면서 느끼는 두려움이란 이렇게 예상치 못하거나, 또는 실수로, 아니면 원래의 바라던 것과는 상관없는 사건의 발생 등이 몰고 오는 미지의 세계가 주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새해에 들어 가면서 국가가 추진하는 정책 과제로 가장 중요시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 단기적 고려, 또는 국내,외 적 문제, 또는 세부 사항으로 나누어 보자면, 안보, 경제, 복지 등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성격을 규정하는 데서 장기적으로 국민 전체에 미치는 효과를 논하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그 우선 순위에서 가장 앞서야 할 것이다.

정책 자체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국민 전체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민족은 우선 무엇보다도 문화적 현실 체로서 .존재하며, 그 장기적 생존성, 그리고 지속능력은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문화의 존재에 달려있다. 만약 그 문화가 시들고 썩는 다면, 그 문화에 따라 민족 국가도 시들고 썩어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우리 자체의 문화적 위치를 높이고 그 우수성을 확산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른바 한류라는 이름으로, 또 예술 분야에서 우리 문화의 전파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동시에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는 데에도 그 목적이 있다.

Joseph Pearce 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는 것은 우리의 현재 및 과거에 대한 전통적 요소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더 강조해야 할 것은 현실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망각이나 무시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세계적 한국을 추구하고 있으나 오히려 마이나스적 최고를 기록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피하고 싶은 불명예를 향해 우리는 가고 있으면서 그것에 대한 의미, 관심, 대책을 뒤로 돌리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2019 8 29일자 CNN 방송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 의 출산율이 1.05,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했고, 작년에는 0.98 을 기록하여 그 최저기록을 또 갈아치우는 우수한 결과를 획득했다.

이것이 세계 최하위의 출산율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CNN 은 이것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런 위기적 상태가 몇 년간 계속되어 온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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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ank Bye-bye Babies 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출산율을 제시하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한국은 1에 근접된 출산율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에서의 20대 여성들의 출산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지방에서의 노동력 부족, 초등학교의 줄 이은 폐교 현상, 등은 이미 오래전 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출산율의 하락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책이 강구된 것은, 또 그 대책의 효과성이라는 의미로 강하게 대책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는 미미했다.

이른바 의회정치를 통해 정책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국민 전체에 확산되는 것도,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 또 국회의원들의 자질 문제와 관련된 정책적 선출의 바탕이 제도와 행태가 융합한 형태로 나타 나지도 않았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현재 5,100만의 한국 인구는 2050년에는 4,400만으로 줄어 들고, 그 이후에는 매년 600,000명의 인구가 축소되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이민자들에 의한 충원이 주요 노동력 보충으로 언급되고 있고,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3 .7% ( 전체 인구의 )이지만 OECD 국가중 가장 빠른 성장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평가다.( Bloomberg Economics, 2019, 11, 27 )

 

우울한 전망

대학에 들어와 국제 정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제일 조밀한 나라중의 하나였다. 후진국의 전형적 형태로 국민 총생산을 인구 수로 나누면 나오는 1인당 소득은 1000달러를 넘기지 못한 상태로 전쟁 직후에 넘치는 실업자, 부족한 식량, 등 그야 말로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제 발전에 따른 소득의 증대로 3만 달라를 넘어서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출산율의 저하라는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것이 중병이라는 생각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따라서 치유의 문제로 생각하지도 못했다.

초기에는 인구 수가 많은 것이 개인당 소득을 떨어트린다는 생각에서 인구가 많다는 것이 마이나스 적인 요인으로 생각되었다. 예를 들어 국민 총생산은 비슷하나 노르웨이등 북구의 나라들은 인구가 800만 정도였으므로  인구가 4,000만으로 되는 나라는 이들 북구 나라들의 일인당 소득의 1/5 에 불과하게 된다.

60년대의 국제정치학 책들은 대부분 국제정치에서 행동의 단위가 되는 국가들의 國力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으나 여기서 인구적 요소는 그렇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국제정치학자들 중에는 이 인구적 요소가 지니는 Vitality   Dynamics 를 강조하면서 국력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한국이 이러한 예의 대표적 예로 되었고, 2000년 이후 중국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우리나라 인구의 구성이 생산력이 낮은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구성으로 생산성이 낮은 상태로 되는 경우 발생하는 문제는 불 보듯 뻔 하다

이미 서구 나라들에서는 인구 저출산의 해결에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교훈은 가정에 대한 의미 부여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재미있는 예를 들자면 4, 5년 전 보수 정권이 지배하고 있을 때 진보적인 지방자치 단체장이 청년들에게 60만원의 수당을 주면서 전통적으로 어른들이 젊은 사람을 격려할 때 쓰던 "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 는 말을 뒤집는 논리로 " 왜 젊은 사람만 고생을 해야 합니까? "하는 것을 선거 구호로 내 새운 적이 있었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당시 보수정권이 이에 대응하여 청년 수당을 70만원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보수, 진보 정당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이런 표만을 위한 선심 경쟁으로 선거를 끌어나간 정치 상황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에서 청년을 끌어 내어 가정의 상호 호혜 부조적 가족관계를 해체해 버리는 사회적 책임은 누구가 져야 하는가?

우리가 일인당 소득이 3만 달러를 이미 돌파 했슴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 젊은이들은 자기 만의 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가정의 화목함에 의한 안정감 보다는 오피스텔의 좁은 공간에서 독신 생활을 즐기고 있다.

정치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이용하여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이 목표인가?

위에서 언급한 Bloomberg 는 서울대의 통계학자가 한국의 인구적 상황이 북한의 핵무기보다 더 큰 위협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인구의 위기는 완전히 예측 가능한 것으로 그 위기의 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북한에 대한 방어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 글을 끝내며, 결론으로 대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총선에서 이런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인구 축소의 추세를 끝낼 정책을 제시하는 정당에게 정권을 맡기는 방법으로 투표를 하도록 국민들에게 권유해 보고자 한다. 과연 우리나라 국민들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것인가.? 지난 해에 대한 반성, 자기 절제, 그리고 시간과 꿈에 대한 경건한 자세와 새로운 해에 실천해야 할 중요한 일들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소망으로 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