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1-24 12:50
내가 겪은 美國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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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美國

위의 제목은  나의 미국에 대한 경험을 한계지으려는 의도와 그것을 통해 미국을 일정한 정형을 통해 분석하려는 방법에서 시도해 본 것이다.
1980년은 국가적으로도 그 前 해에 일어난 10.26 대통령 시해사건, 그리고 12, 12사태 등으로 국정의 혼란의 시기였고, 개인적으로도 내 장래와 관련된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자 했던 불안정한 해였다. 당시 나는 통일원의 공무원으로 총무처에서 실시했던 3급 이상 공무원 해외 파견 교육 대상자 선발에 응모하여 우선 각 부처별로 선발하는 시험을 치르고, 최종적으로는 총무처에서 한국외국어 대학교에 의뢰하여 총 30명의 공무원을 선발하는 치열한 경쟁 시험에서 합격을 하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시 선발시험을 담당했던 외국어 대학교 연수원 측의 말에 의하면 그 시험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시험이었고, 부처별로는 합격자가 한 사람 도 없는 부처도 있었고, 경제 기획원 재무부 등의 부처들이 두각을 나타낸 시험이기 도 하였다. 차관회의에서는 여기에 합격자를 낸 부처의 위세가 높았었다는 후문이 들리기도 하였다.
1979년 1월부터 나는 외국어대학교의 외국어 연수원에 파견되어서 6개월 간의 영어 Intensive Course 를 수료하였다. 그러나 10.26 ( 박대통령 저격 사건 ) 에 이어 12.12 사태가 일어나면서 내각의 사퇴로 정국은 혼란스러워 지기 시작하였고, 1980년 1월부터 는 국보위가 들어서면서 공무원에 대한 肅正이 단행되었디.
당시 결혼하여 1남이 있었지만 나는 결단을 내려 프랑스로 가는 갈을 택하였다. 대학에 다니면서 그리고 軍에 있으면서 틈틈히 익혀왔던 불어를 사용하는 기회를 택하고자 하였다.

미국에의 경험 :美軍의 등장
내가 미국인 ( 군인 ) 을 처음 본 것은 부산 피난 시절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賤身 萬苦 끝에 서울에서 釜山까지 피난을 한 우리 가족은 부산 동광동 소재의 은행과 관련된 합숙소에 방 한칸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합숙소 옆에는 6층 짜리 은행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은 당시 美軍 病院으로 쓰고 있었다. 그 건물 앞으로는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었고, 우리들은 그 공터에서 놀이를 하고는 하였다. 날씨가 좋은 날은 이 병원의 창문이 모두 열리고 환자로 보이는 미군 병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곤 하였다.
어느 날 저녘을 먹고 나와서 놀고 있던 우리들 위로 갓을 씨운 전등이 그 병원 윗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권투용 글러브를 든 한국인이 그 들을 도와주기 시작하였고, 그 때 당시에 그 주변에 있었던 꼬마들에게 모이라고 한 다음 권투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들이었던 우리들은 권투 글러브를 처음 끼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상대방을 치는 행동을 익혀 나갔다,
그 다음 단계는 본격적으로 두 꼬마가 나와서 권투를 하는 단계로 들어 갔고, 위에 있는 미국병사들은 시간을 재고 종을 치면서 분위기는 차츰 오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의 게임이 끝나면 위에서 승자를 가리고 그에게 초콜렛, 껌, 비스켙 등을 줄을 통해 주었다, 여기에는 상품으로 아이들을 위한 구슬등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점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고, 권투를 하는 몸집들도 커지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오는 지는 몰라도 이들은 상품이 더 커지면서 C-ration 상자들이 나오자 게임은 더 치열해 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은 피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이 게임을 시작할 때의 동네 꼬마들은 다 없어지고 더 치열한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어느 날 부터 이 갓을 씌운 전등은 내려오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이 권투가 시작될 때에는 거의 모든 병실의 창문이 열리고 그 병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응원도 하고 즐거워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난폭한 싸움의 모습이 되자 그 창문들은 하나 씩 닫히기 시작했다.
1990년 국방부 주최로 한국 전쟁 40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회의 에서 나는 발표자로 참석했던 John Edward Wilz 교수 ( Indiana University , Bloomington 1930-1994 ) 를 만났다.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눈 이야기를 통해 Wilz 교수가 한국전쟁 참전 용사라는 것을 알았고, 그가 참여했던 전투지인 Punch Bowl 를 방문했으면 하는 희망을 듣고 나는 국방부 측에 알려주었다. 그는 Punch Bowl (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소재- 당시 민간인 통제지역 ) 을 방문하고 귀국한 후에 그의 저서 ( Democracy Challenged: The United States Since World War II, Harper & Row Publlishers, 1990 ISBN10: 006047167 ) )  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동광동 소재 미군 병원에서 동네 꼬마들의 권투 시합을 지원하고 환호를 올렸던 그 군인들도 Wilz 교수처럼 20세에 참전했던 젊은이 들이었다. Wilz 교수는 한국을 방문한 직후에 United States Policy vis-a-vis Korea, ( 1850- 1950 )1992, 제목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나 1994년 에 작고하였다. 그는 그 저서를 보내면서 나에게 " An Esteemed Colleague, with Every Good Wish " 라는 글을 보내주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Wilz 교수는 나에게 묵직한 여운과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미국문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그 당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누님이었다.
어느 날 그 누님이 나에게 도넛처럼 생긴 레코드 판을 주었으나 그 당시 구식 전축을 가지고는 이것을 들을 수 없어서 아버지를 졸라 수리를 한 후 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노래는 Paul Anka 가 부른 Diana 였었다.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폭발적이면서도 간절히 호소하는 박력있는 노래, 젊음을 발산하는 표정과 몸짓을 부러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 TV 가 보급되면서 AFKN 을 통해  본 그 모습은 더 감동적이었다. 대체로 TV 는 오후 5시 30분,, 그리고 라디오로는 세시부터 시작되는 컨트리 뮤직, 그리고 네시 부터 시작되는 It's Top Twenty Time, 등은 나를 완전히 미국 음악에 사로 잡히게 만들었다.
나는 50년대 후반기의 중학생 시절부터, 고등학교, 대학은 물론 심지어 軍에 복무하는 시간에도 AFKN의 방송을 통해 이것을 들었디. 주로 美軍을 위한 방송이라서 대부분 움악 시간이 많이 편성되어 있었고, 특히 12시 이후 심야 방송에서도 이 음악은 계속되었다.
그 중에 가장 감동적인 방송은 미군이 Vietnam 에 파병된 후에 편성된 오후 10시 30분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한밤의 음악편지"의 모델이 되기도 한 미국의 본토로부터 한국의 AFKN 으로도 전파된 음악편지 시간이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전파를 통해 가족과 연인들의 사연과 음악이 전달되는 것을 듣는 것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이 때에 주로 들은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60년대 초반에 미국의 Pop music 으로 chart 에 올라 갔던 여성 보칼 들의 노래였던 Soldier Boy, I Love how you love me, To know him is to love him, . Sixteen Reasons (why I love you. )  등은 그 시간을 통해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다. 이와 더불어 AFKN 을 통해 Snake Pit ( Olivia de Havilland 주연 , 1948 )등의 인상적인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Jan Clayton이 부른 Dvorak 의 음악을 편곡한 Going Home 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프랑스를 택한 이유
나는 1981년, 나이가 넘어 프랑스의 사회보장 제에 의한 Allocation ( 보조금 )혜택도 받을 수 없는 프랑스로 날아 갔다. 그 때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마음 놓고 피우던 때였는데 옆 자리에 앉은 이태리 친구들의 댓진 냄새를 참아가며 장시간 비행기를 탓 던 기억이 있다.
나는 학부 시절에 이용희 교수와 노재봉 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국제 정치 이론, 외교사 그리고 Area Studies 를 통해 냉전 시대에 제 3의 길을 모색한 Tiers Monde 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두 개의 졸업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제도에 따라 그 중의 하나를 나는 Tiers Monde, 로 정했고, 그것에 필요한 자료를 대부분 노재봉 교수의 서재에서 도움을 얻었다. 특히 Tiers Monde 에 관한 책들은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것으로 당시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 이외에도 프랑스에 가기 위해 준비한 것은 프랑스 대학에만 있었던 Sociologie de ㅣ'Economie, Sociologie Politique, 등의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출발에 앞서 나는 Paris에 있는 Ecole des Hautes Etudes 의 Jacque Vernant 교수와 서신 교환을 통해 연구분야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8월 말에 Paris 에 도착하였을 때 교수들은 아직 Vacance 중이었고, 등록은 9월 초에 하도록 되어 있어서 나는 결국 Paris 10 대학의 Sociologie Politique 부문 책임자였던 Kriegel 교수와 면담을 하고 사인을 받아 박사과정 ( DEA )에 등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박사과정의 한 course를 담당하고 있었던 Vernant 교수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 당시 그는 그 주제를 Guerre Froide ( 냉전 )로 제시하고 있어서 매우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Paris 10 대학 내에는 Bibliotheque de Documentation Internationale Contemporaine ( BDIC ) 라는 크고 중요한 도서관이 있어서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지도교수였던 Kriegel 교수의 도움으로 나는 사회보장제도에서 학생 가장에게 주는 최대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박사과정에서 나는 Vernant 교수, F. Bourriccaud. 교수 ( Paris 4 대학 ) 그리고 Kriegel ( Sociologoe Politique ) 교수의 course를 선택하였고, 그 중에 Guerre Froide 를 주제로 했던 Jacque Vernant 교수로부터 는 프랑스를 포함하여 외국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점수 ( 20점 만점에 17점 ) 을 받아서 DEA 를 단기간에 통과할 수 있었다.
이 강의들은 각각 발표 한번, 세미나들에서의 적극적 참여 발언 그리고 Term Paper 의 제출로 평가하도록 되어 있어서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재미있었던 것 은  Vernant 교수의 명성 때문인지 신청 학생이 너무 많아 Pont Mirabeau ( 유명한 미라보 다리 ) 쪽의 특별 강의실이 있어서 매주 한번 씩 미라보 다리를 거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박사과정은 각 Course별로 Expose ( 발표 ) 한번, 각 세미나에서의 적극적 토론 참여 발언, 그리고 최종적으로 Term Paper 의 제출을 하면 각 교수 별로 20점 만점으로 점수를 부여하고  이 점수에서 10점 미만은 과락으로 탈락, 평균 12점 이상 획득해야 Passe의 평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해에는 등록한 총 28명의 학생 중 다섯 명이 통과했다.
6월에 접어들어 이런 과정이 다 끝나고 한가한 때에 나는 그 당시 내가 맡고 있었던 재 프랑스 한국 유학생의 회장직을 위해 임원 들과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우리는 Cite 남쪽에 있는 21번 Bus  종점에 있는 까페에서 - 우리는 이 까페를 종점 까페라고 부르고 있었다.- demi 를 마시고는 했다.
어느 날 저녘 때 쯤 이 까페에서 demi 를 마시던 중 무대 한쪽에 있는 오래 된 Juke-Box 를 발견하고 다가가 보던 중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동전을 넣고 음악 리스트를 보았다. 여기에는 전부 오래된 미국 Pop Music 만 있었고, 그 중에 나는 오랫만에 The Crystals 가 부른  Then He Kissed Me,( 1963년 Pop Chart 에 오름 ) 를 보고 버튼을 눌렀다.
이런 까페에서 bavarder 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갑자기 폭발적이고 경쾌한 노래가 나와서 나도 당황했지만 프랑스인들도 이 Oldies But Goodies 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청바지와 가죽잠바에 뒷 포켙에 말보로 담배 곽을 찔러 넣은 것은 이들의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을 말해 주고 있다.

미국과 일본
일본 군국주의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그 후 소련 국경까지 올라가서 1939년 소련과 처음으로 국경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그 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은 그 방향을 바꾸어 남방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에는 1907년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일본과 Taft-Katsura 협정을 비밀히 체결하여 일본에게 한반도의 지배를 인정하고 영-일동맹을 용납 ( Condon ) 함으로서 일본의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허용하였고, 반면 일본으로부터 는 필리핀에 대한 장악을 인정받았다는데 있었다.
이 것을 그들은 세력균형에 의한 것이라고 정당화 하고 있다. 제국주의시대가 종언을 고한 지금, 이 세력균형적 접근은 Sanction 이라는 또 다른 개념으로, 이제는 불가능한 영토의 분할이나 할양을 대신하여, 정책적 종용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용하는 국제 질서의 원칙으로 되는 것은 아닌가?
미국은 한국에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간인 정부가 들어서는 단계에서 이런 일본과의 비밀스런 협정의 체결을 변명하였으나, 2011년에 작성된 위의 글은 이 비밀협정의 내용을 숨기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T. Roosevelt 대통령 시에 작성된 문서에는 당시 미국은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에 대비하여 해군 출신이었던 Roosevelt 대통령이 Great White Fleet 를 16척의 전투함으로 구성하여 1907년 12월 부터 1909년 2월 까지 태평양, 인도양, 지중해를 거쳐 미국 동해안으로 돌아오는 대 항해를 통해 그 위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까지 일본 제국은 필리핀을 포함하여 동남아를 짓밟고 태평양을 유린하였다 일본은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국에 패한 후 일본 본토의 수호로 움츠러 들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42년 부터 논의하기 시작한 戰後 세계질서에서 1907년과는 반대되는 한반도의 독립을 인정했다 ( Mont Tremblanc회의( Canada ),  Pacific Affairs 참조 )
미국은 한국 전쟁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지만 항상 현실주의적 이익을 취하면서 힘의 뒷바침을 받을 경우에만 정책의 의미를 강조하였고, 이 정책이 포함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의 목적은 이것의 영향아래 있었다. 이것은 중국이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 하며 한국 전에 뛰어 든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적, 정책적 retardism 은 아마도 맥아더의 일본 점령에서 이미 그 싹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하고자 하자 7월 26일 미국은 포츠담회담에서 그 조건을 제시했고, 이와는 관계없이 핵 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군이 공격하자 일본은 8,15일에 항복을 했고, 그 후에 연합군 사령관이 된 맥아더는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8월 29일 일 왕을 포함한 일본 정치기구를 통해 권한을 행사할  것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George C. Marshall 을 1946년 중국에서의 또 다른 국공합작을 위한 시도에서 파견한 것은 이미 1945년 8월 부터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을 점령한 후였다. 물론 F. Roosevelt 대통령이 사망한 것이 큰 이유가 되겠지만 그런 요인으로 만 1946-50년의 중국 대륙 과 동아시아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역 부족이다.
1920년대에, 중국의 유명한 정치인이 될 주은래와 등소평이 프랑스에서 만나 교분을 두터히 하였다. 비록 이념적 내용은 우리와 다른 것을 표방하였으나, 이들은 1940년대 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을 오늘날의 중국으로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그런 면에서 중국의 주권적 권력의 확보와 경제적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매년 발간되는 중국 군사 백서에는 1840년 부터 중국이 서구 열강으로 부터 당한 국가적 수모를 중국의 국권 회복과 경제발전으로 극복하려는 의도를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의 항복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을 다루는 과정은 매우 특이 했다. 2006년 12월에 Matthew LaPlante 가 쓴 글, 그리고  Patrick Lenox Tierney ( Utah 대 ) 가 쓴 글을 종합해 보면, 그 당시 日王 이 맥아더에게 공식적으로  Apology를 하겠다고 발표하고, 맥아더의 집무실에 도착했으나, 맥아더는 그 특유의 파이프를 피면서 신발을 벗고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Tierney 에 의하면, 맥아더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왕 을 받아 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들어 오라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Tierney 는 맥아더가 그 당시에 일본문화의 전문가로서 생각되었으나 그렇지 않았고 맥아더를 무례하고 거칠은 인물로 표현하면서 이런 사실들이 공개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이 이락, 아프가니스탄 등에서도 이런 행동을 되풀이 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이 당시의 미-일 관계를 Herbert P. Bix 는 상호간의 보호, 그리고 편리성에 두고, 맥아더의 생각에는 일왕을 통한 지배가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그의 일을 더 쉽게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일왕을 온건한 것으로 표현하고 만주사변 이후 일본 군국주의의 강탈로 도조를 비롯한 군부에게 전쟁 책임을 돌리고 일왕 을 전쟁범죄로 기소할 수 없음을 맥아더는 보고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의 미국의 대일 입장은 평화적 점령, 그리고 일본의 복구를 가져오는데 중점을 두고 공산 혁명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일본 지식인들이 요구하는 일왕의 양위와 왕족의 처벌을 물리치면서 일본을 선진국 대열로 이끄는 문제, 상비군 설치문제, 평화헌법, 그리고 의회 내각제의 채택으로 이끌었고, 1948년 국무부의 개입으로 맥아더의 권위를 종식시켰다.
맥아더는 사라졌지만 그가 누리던 미국적 권위는 아직 일본에서 동반자적 ( Partnership ) 관계를 통해 지속되고 있으며, 그나마 일본의 자존적인 만족을 위해 어정쩡한 전범자에 대한 공물이나 제사의 형식으로 허용해 주면서, 주변국들의 눈총 속에서도, 체면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미국의 동 아시아에서의 정책적 행동 반경은 위축되거나 축소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최근에 제시된 RCEP(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enership ), 아시아 국가 15 국이 가입한, 2020년에 조인될 이 기구에 미국은 가입하지 않고 있다. 이 기구는 세계 총 GNP 의 1/3을 차지하는 세력을 가진 것으로 앞으로 그 위력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러한 소극적 자세는 미국의 입장의 약화 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아시아에서의 퇴조로 까지 이어질 가능성으로 그 고립주의를 현실화 할 것인지 우려된다.세계에서의 지도를 말하기에는 너무나 편협된 자기 이익의 강조, 極化된 현실주의의 모습만을 보이고 있다.

대단원
1987년 여름에 나는 주한 미국 대사로부터 서한을 받고 내가 국무성의 International Visitor Program의 수혜자로 선정 되었슴을 통보 받았고, 곧 이어서 미국을 방문하면서 해야 할 일을 대사관과 상의하였다. 1988년 1월 8일 새벽에 위싱톤에 도착하면서 눈이 엄청나게 쌓인 풍경은 오히려 내 마음을 풍족하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에 충실하고 관련된 인사들과 가진 교류는 나의 미국에 대한 작지 않은 소견을 확인시켜 주면서 미국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다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방문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내가 1986년 Korea and World Affairs 에 한국전쟁 관련 영문 논문을 실렸던 것이 내 지도 교수인 Kriegel 교수의 추천으로 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Abstract 에 등재된 데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미 국무성으로 부터 시작된 미국에서의 여정은 빈틈없는 프로그램과 만남들로 꾸며져 긴장을 하게 하면서 한-미 관계의 발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였다. 이 방문을 통해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무성 소련 국의 Jack David Segal 이 미-소 회담의 지역문제로서의 한반도 문제 논의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 Pacific Forum 의 Joe Vasey 제독의 브리핑이었다.
끝으로 아쉬움을 표하자면, 내가 프랑스로 부터 학위를 받고 귀국하자 일부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인사들이 나를 Paris 10 대학이 1960년대 좌파 운동에서 했던 것을 연관시키면서 좌파로 표현하는 일이 있었으나, 1980년 대의 Paris 10 대학은 교수들의 노령화로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고, 지스까르 데스땡 과 같은 보수파의 집권으로 정체에 빠진 프랑스를 다시 다이나믹하고 창의적인 발전을 위한 정치적 쇄신의 토대를 다지고 있었다.
최근에 Paris 10 대학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현 대통령인 Emmanuel Macron (철학) 은 물론, Nicolas Sarkozy 대통령 ( 법학 ) 과 IMF 총재를 지낸 Khan 등이 Paris 10 대학의 동문임을 밝히고 있다. Macron 을 정치적 중도좌파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중도 우파로 분류되며, Sarkozy는 중도 우파였고, Macron 이 프랑스의 전통적 외교 로선을 따라 친러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제  ( 11월 22일 ),한-일 간의 갈등으로 표출된 GSOMIA 종료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타결되어 미-일-한 간의 군사정보에 관한 협력이 유지되기는 했으나, 이와 동사에 거론된 미국과 한국의 방위비 분담 문제는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한-미 간의 방위비 분담문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작년의 5배의 인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총 50억 $의 인상을 제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반면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방위비 인상은 80억 $ 로 지난해의 4배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 형평성을 언급하면서 ( 11월 20일 ), 미국의 국무부가 한-일에 요구하는 액수는 한-일 간의 GDP 를 비교하여 볼 때, 한-일 간의 GDP는 1:3 의 차이를 보이는데 비해 ( 일본의 작년 GDP, 4,971 Trillion, 한국 1,619 Trillion WB 자료 ),, 미국이 한-일에 요구하는 방위비 액수는 50억$: 80억$ 로, 1: 1.6..의 비율로 나타나고 있어, 그 비율에서 한국에게 더 큰 부담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공개된 자리에서 한국이 일본의 안보 비용의 면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을 할 정도로, 미국의 방위비 분담 요구에서 공정치 못하고 공평하지 못한 결과를  한국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KBS, News, 2019, 11월 20일 ). 미국 측의 공정, 공평은 수학적인 것과는 관계없는 개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