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2-21 21:24
내가 마지막 본 빠리 ( IV )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470  
   빠리 ( II ).hwp (26.0K) [72] DATE : 2012-12-21 21:24:20
빠리를 떠나면서 기분이 착잡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 였던가?
내가 프랑스를 유학지로 택한 것은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뉴스는 아니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우리는 서울대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던 덕분에 우리과 교수들로부터 처음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고 그중에 가장 원로 교수였던 이 용희 교수님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셔서 우리를 환영하고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로의 약진을 촉구하셨다. 내가 프랑스어를 시작했던 것도 그 영향을 받아서 였고, 중간에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하면서도 프랑스 문화원의 최고 과정에서 프랑스어를 계속 공부하였다. 내가 군 제대를 앞둔 어느 년말에 그 당시 문화원장이었던 Mercier 는 자기 집에 초청을 한 자리에서 언제 갈 생각이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대후 나는 통일원 정책기획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했던 일을 나는 지금도 좋은 수련 기간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정책 기획, 정세분석 등에서 나는 어디에서도 얻지 못할 좋은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 때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출마를 했었던 구본태 씨와 공동으로 북한 정책제의 및 성명, 논설 등을 통해 나온 48년에서 76년까지 기간의 모든 발표를 북한이 74년 통일의 5원칙이라고 했던 것에 기초를 두고 시계열 분석한 것은 당시로서도 엄청난 작업이었었고, 또 귀중한 정책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시계열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북한의 정책을 이념적으로 분석한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 후에도 나는 특별 지시에 따라 카터 대통령의 3당국 회담 형식의 제의 가능성을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의 회담 과정과 협정 체결의 선례 분석에서 타진하고, 그 내용을 검토한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또 그 당시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던 Euro-Communism 에 대한 분석을 통해 서유럽 국가 내의 공산당들과 쏘련 공산당 간에 있었던 이념적 논쟁과 대립의 내용에 대한 자료의 발굴과 분석을 한 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였다.
통일원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었던 행운은 그 당시 총무처에서 온 공문에 의거하여, 각 부처에서 그 부처의 인원 수에 따라 2-4명의 3급 공무원 들이 선발 되고, 100여명에 가까운 그 인원 중에서 다시 한국 외국어 대에 있었던 어헉연수원에서 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30여명이 선발되어 해외 파견교육 공무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이후 외대에서 6개월 간에 걸친 집중 영어 교육을 받았고 떠날 차례만 기다리던 중, 대통령 시해 사건이 벌어진 후 공무원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나는 다른 방향을 택하게 되었다.
나의 사관학교 정치학 교관 경력, 그리고 통일원에서의 정책 기획, 정세 분석의 경험은 박사과정의 수월성을 보장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은 도착 후 가져야 되는 체류증과 학교 등록의 문제였다. 우선 체류증은 학생증을 얻을 수 있으면 쉽지만 학생증을 얻을 수 있을 때 까지 그 곳 경찰, 구청 등을 전전하면서 각종 서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박사과정의 등록 문제는 무엇보다도 담당 전공의 교수의 싸인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실제로 등록시에는 100프랑 미만의 비용만 들면 되었다.
다행히 처음에 거주할 곳은 대사관의 도움으로 빠리 남쪽에 있는 Cité에 있는 프로방스 관 ( 프랑스 지방 학생을 위한 기숙사 ) 에 방을 구했다. 나이가 들은 학생이라고 해서 방은 조금 큰 것을 얻었는데 세면대, 책상, 침대 옷장 등을 갖추고 있었다. 식당은 이곳 Cité에 있는 네 개의 식당을 이용했고 시내 곳곳에 있는 대학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박사과정의 강의는 시내 곳곳에 있었던 강의실에서 있었는데, 대부분은 까르띠에 라뗑 지역에 있었지만 어떤 것은 미라보 다리 쪽에 가까운 지역에 있어서 메트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강의실, 도서관, 기숙사, 를 맴도는 생활을 일년 내내 하면서 먼저 교통부터 익히고, 다음 음식, 그리고 문화생활 등으로 점점 그곳의 생활이 내 몸에 배어 들어 왔다. 나는 학생 식당의 음식을 어느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었던 덕분에 그곳의 음식을 즐기는 입장이었다. 대학 식당의 메뉴는 일주일 정도의 식단을 단위로 짜여져 있었는데 철저히 계산된 칼로리에 의해 대체로 생선,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 등이 점심과 저녁만 제공되는 식사에 적절하게 배분되어 나왔고 후식이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어느 날씨 좋은 토요일 점심 때, 특식으로 나온 Cous Cous를 먹으려고 OUest ( 서쪽 ) 식당 앞에 기다란 줄이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보는 것도 좋은 추억 거리 였다.
당시에 식당에서 내야하는 티켙 값은 5프랑 ( 1프랑은 100:1 원화 )정도로 싼 편이었고, 교통비는 한 달 짜리 표가 120-150프랑 정도였다.( 1981년 기준 ) 따라서 한달에 500 프랑이면 교통비와 식당비에 충분한 액수였다.
유학생활 중 내가 했던 일 중에 가장 뜻밖의 일은 유학생 회장의 일이었다. 어느 날 재불 한인회의 유지 모임에 불려 나갔다가 나는 유학생 대표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며칠 후나는 한인회 사람들의 집요한 요구에 못견디고 유학생 회장 선출 모임에 나갔고, 곧 나는 유학생 회장이 되었다. 내가 한 일은 일년에 두 번 한국 유학생을 위한 Boum ( 미국식 파티 )을 개최하고 유학생 안내 책자를 만들었고, 한국에서 오는 인사들에게 유학생회의 일을 홍보하는 일을 해야 했다.
또 매년 7월에 열리는 유럽의 한국인들의 체육대회에 참가하기위해 봄부터 그 연습을 해야했는데, 주말마다 내가 있었던 기숙사 앞의 운동장에 모여서 달리기와 공차기를 했다.
피곤한 일정이기는 했지만 나는 도서관에 나가는 것과, 저녁을 먹은 후 Thèse 초고를 작성하는 타자기 작업을 매일 일과처럼 계속했다. 내 타자기는 DEA 과정에서 제출하는 논문들을 300여 페이지 작성하고, 학위 논문을 위한 1200여 페이지를 작성하면서 완전히 그 수명을 다하는 충성을 보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있었던 지도교수의 강의에도 충실히 나가야 했던 것은 물론이었다. 유학생 회장 재직중 나는 두 명의 여학생의 사망을 겪게 되었다. 한 사람은 서울에서도 잘 알려진 명문 대학 출신으로, 빠리의 더운 여름에 교수와의 랑데부를 둘러싸고 행정 직원들과 싱갱이를 벌이던 중 길에서 실신한 끝에 사망하게 된 경우고, 다른 한 사람은 유학생활을 목표를 상실한 채 즐기려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였다.
회장을 맡고 난 후에 벌어진 일 들, 밤 늦게 불현 듯 들이 닥치는 사람들, 여기 저기서 걸려오는 전화, 등으로 애가 놀라는 일도 있었고 이런 일로 나는 아내와 다투면서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었이냐라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에도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도 Sud( 남쪽 ) 식당의 Controller로 있었던 얼굴이 붉은 동안의 할아버지, 운동장 관리인으로 있었던 아랍계로서 새벽에 운동장을 뛸 때 마다 나를 보고 ‘Bon Courage’ 하면서 손을 흔들던 사람, 프로방스 기숙사의 호랑이 여자 기숙사감, 도서관의 사서들, 그리고 어쩌다가 친구가 오면 갔던 뽀르뜨 도를레앙의 메트로 종점 옆의 Café의 미녀 마담, 그리고 Certain faces and Certain smiles, . 2006년 방문시에 이들을 찾아 보았으나 사서만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주일 마다 만났던 성당의 신부님들은 내 생활을 어떤 유혹이나 해꼬지 에도 굴하지 않도록 해준 고마운 분 들이다. 빠리 시내에도 있었지만 빠리 교외에 있었던 그 넓고, 많은 공원들은 주말마다 우리 가족에게 고요한 휴식과 싱싱한 공기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안식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