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영화가 그 도입 부분이 아침에서부터 시작하면 대체적으로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거나 매우 희망적인 끝 맺음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빠리에 처음 도착한 때는 칠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강하게 쏟아지는 햇빛을 느끼면서 쳐다 본 빠리의 하늘은 약간 흰 빛을 머금은 푸른 하늘이었다.
30대의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택한 유학의 길이었기에 나로서는 비장한 기분이 들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험난한 과정을 어떻게 겪어 나가야 할지 암담하기도 하였다.
어떤 친구는 그냥 몇 개월 관광이나 하다 가지 뭘 그러냐고 빈정대기도 하였지만 그런 객쩍은 말에 대꾸를 하고 픈 생각은 없었다.
이 곳 빠리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박사 과정에 등록을 끝내고 과정이 시작되고도 몇 개월이 지나서 였다. 이 곳 사람들이 지키는 천주교 절기에 따른 휴일이 학기 중간에 짬짬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박사과정에 있는 프랑스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고 따라 갈 수 있었다.
빠리의 첫 겨울은 한국의 겨울에 비하면 그렇게 춥다고 표현할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겨울이 雨期로 되기 때문에 습도가 높은 겨울로 인해 감기가 쉽게 걸리고 더군다나 유럽의 겨울을 처음 보내는 나로서는 그 날씨가 더욱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년말을 보내면서 이 곳의 풍경을 즐길 여유는 잠간이었고 새해로 들어 가면서 담당 학과장 교수의 꽁트롤 ( Control )이 시작되었고 서서히 이 통제는 세미나에서의 발표와 적극적인 토론에의 참여로 조여 들어오고 있었다.
DEA 과정이라고 불리우는 박사과정은 각자 3개 Course를 선택하도록 되어 있고 이 개설된 과정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J. Vernant ( 국제관계 ), A. Kriégel ( 정치사회학 ), 그리고 F. Bourricaud ( 국가와 사회 ) 교수의 강의였다. 각 코스마다 일년 동안 3개 부문으로 나뉘어 세미나 발표, 토론 질의 참여, 최종 보고서 제출 등으로 평가되면서, 코스 별로 20점 만점에, 종합 평균 12점을 넘을 때에만 통과한 것으로 판정이 되는 매우 까다롭고 섬세한 과정이었다.
박사 과정에 등록된 학생은 전부 28명 인데, 그 중 프랑스학생이 대부분이었고, 그리스, 터키. 스페인, 이집트, 꼬트 디봐르, 자이르, 그리고 나를 포함해 1/4이 외국학생이었다. 이외에도 지도교수의 강의에 매주 참석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DEA 과정을 통과한 프랑스 학생들로서. 이들은 대부분 박사과정을 하기 전에 Agrégation 자격시험을 통해 중-고교 교사 자격증을 얻어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에 아주 인상적인 여 교사가 있었다. 곧 그해 마지막에 학위를 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는 빠리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가량 가는 지역인 Lille 의 고등학교 교사 였는 데, 당시에 30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녀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녀의 얼굴 모습에서도 그 이유가 있지만, 어느 날 그녀가 강의 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한 복장과 얼굴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지도 교수의 강의는 오후 늦게 시작하여 저녁 7-8시에 끝나는데, 그 날은 비도 내린데다가 어둑한 시간에 그녀는 아래 위로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가죽 헬맷 까지 썻다가 벗은 상태로 강의 실에 등장했다. 금방 벗은 헬맷에 딸린 안경 때문에 그녀의 눈 주위에는 까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Lille에서부터 시간에 쫒기면서 비속에 2륜차로 달려 온 것으로 보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몸매에 스피드를 즐기기를 좋아하고, 박사학위에의 열정을 보이면서 가끔 담배를 멋있게 뽑아 무는 여자였다.
DEA 과정을 끝내면서 최종 결과는 과 사무실 게시판에만 공고한다고 해서 대학을 갔던 날 그녀는 지도 교수와의 면담을 위해 행정실에 앉아 있었다. 내 성적은 내 눈을 의심하리만치 세 번째 란에 내 이름과 더불어 평균 13점으로 나와 있었다. 평균 12점을 넘은 5명 중 세 번째 였다. 5명 중 프랑스학생이 세명이었고 마지막은 그리스 여학생이었다. Vernant 교수가 나에게 준 17점은- 지도교수의 말에 의하면 - 당시로서는 외국 학생이 얻기 힘든 점수라고 할 수 있었고, 이것 때문에 나의 지도교수는 나에게 Vernant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받도록 강요했다.
그 녀는 나에게 ‘Félicitation' 하고 낮게 말하면서 악수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늘 강의실에서만 볼 수 있었고, 그것도 눈 인사로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차분한 인상과 달리 그 녀의 눈은 늘 무엇을 갈구하는 듯 한 강열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과한 후 부터는 박사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지루하고 힘든 지도교수와의 승부가 남아 있었다.
DEA 과정을 끝낸 후 나는 가족과 합류했다. 드골 공항에서의 가족과의 만남은 어색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5살 짜리 꼬마는 나를 보고도 엄마 뒤로 숨는 시늉을 했고, 조금 피곤한 표정의 아내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친지의 도움으로 빠리 서쪽에 있는 라데빵스 지역에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고, 지도 교수의 권유로 가족을 가진 학생을 지원하는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매달 1900프랑의 지원금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한달 생활비의 80%를 채워 주었다.
경제적인 것은 별로 문제가 없었으나, 가족과 같이 보낼 시간이 충분치 못한 것이 항상 아쉬웠다.
꼬마는 다행히 그 지역의 Ecole Maternel 에 보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고, 그곳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다녔다. 아내도 그 지역의 구청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하는 그림그리기와 뜨개질 등을 배우려 다니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일본 여성을 만나 서투른 일본어를 써 가면서 시내 구경을 다니기도 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도서관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논문을 타자로 치면서 보냈다. 그 당시에는 중간 가격의 전동 타자기가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프랑스어 타자기를 그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을 주고 구입했었다. 이미 DEA 과정의 최종 보고서를 치면서 투자한 이상의 소득을 얻었지만 박사 과정의 논문도 이 타자기로 끝을 냈다.
일요일에 같이 한인 성당에 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운 일처럼 되어 버렸고, 그렇게 유학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동안 영국에 있었던 친지를 한번 방문한 것 이외에 빠리를 벗어나 보지 못한 것은 한으로 남았고, 그 한은 2006년 연구년을 프랑스에서 보내면서 풀 수가 있었다.
Soutenance가 있던 날은 여름으로 들어가는 계절로 아주 맑고 싱싱한 날이었다. 논문 발표와 질의 응답이 있었지만 그렇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나는 기분이 개운한 느낌이었다. 2시간 가량의 질의,응답시간 끝에 나는 Mention을 Trés Bien을 받았다.
논문 심사를 했던 교수 중의 한 분이 꼬마와 악수를 하면서 ‘ 너는 이제 박사의 아들이 된거야 ’ 하면서 축하를 해 주었다.
여행을 좀 하고 싶었지만 조금 참고 그 대신에 벨지움 가서 하루 밤을 보내고 그 다음 날 스위스 츄리히에서 떠나는 KAL 기를 타기로 하였다. 대사관의 교육관이 나에게 좋은 소식이라면서 서울대의 교수 채용공고가 나와 있는 신문을 주었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빠리 북역에서 특급을 타고 긴 여행을 시작했다. 그 날 따라 하늘이 흐려 있었고 기차가 떠나면서 서서히 가랑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빠리를 빗 속에 떠나면서 나는 기분이 착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귀국하면서 끊기로 했던 담배에 자꾸 손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