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의 붕괴 25주년을 보내며,
흔히 무엇을 기념하는 일은 대체로 50주년, 또는 100주년 등으로 행해 지는 것이 일반인데, 최근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두고 80이 넘은 고르바쵸프, 그리고 키씬저와 같은 정치인들이 미국-러시아 간에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언급이 있은 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었다고 보는 입장에서 이것이 다시 화제로 되고 있는 것 같다.
1989년 11월 9일 저녘, 이 날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첫 날이다. 미국 언론 중에는 이것을 하나의 해프닝처럼 보도하려는 태도가 보이는데, 그것은 동독 공산당의 간부
Gunther Shabowski 가 회의 내용을 발표하는 가운데, 동독인들이 외국을 방문할 수 있는 증명서가 발급되며, 이것으로 자유롭게 서독을 비롯한 자유국가들을 방문할수 있다고 하였고, 이에 대해 기자들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당황한 이 간부가 곧 실시될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 발단이 되어 동독인 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기념
11월 9일의 붕괴의 날을 앞두고 왜, 어떻게 베를린 벽이 붕괴 되었는가를 주제로 한 여러 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중에 두 여 교수가 쓴 글들은 왜- Barbara Elliott, 휴스턴 침례대 교수, 어떻게- Mary Sarotte, USC 교수,-를 주제로 하고 있어 통일을 갈망하는 우리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통신사 기자들의 글, 주로 유럽에 근거를 두었던 기자들의 글들이 베를린의 장벽의 붕괴를 기념하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1989년의 장벽의 붕괴와 동-서 독일의 통합은 거의 일 년의 시차를 두고 있다. 동-서독의 완전 통합이 법적 효과와 더불어 실제 완성된 것은 1990년 10월 3일 자정을 기해서 였다
먼저 동독 의회는 1989년 8월 23일, 동독의 5개주를 서독에 승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것은 서독의 기본법 23에 의거한 것임 ), 8월 31일에는 동-서독 간에 통일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다시 동-서독 의회에서 각각 9월 20일에 통과되어 이에 따른 내부적 조치를 거쳐 통일 조약의 규정에 따라 10월 3일부터 발효되게 되었다.
1년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통합은 Barbara Elliott 교수에 따르면, 멀게는 1953년의 동독에서의 봉기 부터, 1956년의 헝가리 사태,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들을 통해 동 유럽인들은 소련의 지배를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예견되어 있었다.
장벽의 붕괴 25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는 11월 7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는데,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환희” 연주를 포함하여 영국의 연극 공연, 그리고 장벽이 있었던 15km를 따라 빛이나는 8000개의 헬리움 풍선을 3.5m 의 높이로 달아 놓고, 평화와 비폭력적인 혁명을 상징하는 의미로 하나씩 줄을 끊어 풍선을 날리는 연출을 했다.
독일 수상 메르켈은 그 자리에 장미를 가져다 놓으면서 이 장벽의 붕괴는 세상 사람들에게 “ 꿈은 실현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그 첫 풍선을 끊어 하늘로 날리면서 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은 “ 25년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으며,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전율을 맛보았다.” 고 말했다. 그는 또 “ 자유의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고 말했다.
1961년, 동독이 자유를 위해 탈출하는 동독인을 묶어 두기 위해, 160 km 를 흰 콩크리트 벽으로 쌓아 서베를린을 포위했던 이 장벽은 28년만에 사라져야 했다.
왜 붕괴했나?
B. Elliot 교수의 경력은 7,80년대, 유럽에 근거를 둔 기자생활에서부터 출발하여, 휴스턴을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을 거쳐, 대학의 강단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바탕을 둔 도덕적 교화를 통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추구하는 정력적인 활동에 이르고 있다.
그는 왜 1989년의 평화적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붕괴하였가 라는 질문 아래 그당시 보도된 붕괴의 이유를 8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1) 소련 자체의 경제체제가 붕괴되었다는 점, 2) 미국과 NATO 의 군사적 구축이 소련을 파산시키는데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 3) 소비에트제국의 확장이 결국은 그 효과적 통치를 불가능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역기능적이었다는 점, 4) 통제경제에 대한 자유 시장경제의 승리, 동구인들은 시장경제를 원했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Elliott 교수는 여기에 요한 바오로 II 세, 레이건대통령, 고르바쵸프 등, 역사적 인물들의 기여를 추가했다. 특히 그는 이 평화적 혁명의 주역인 동유럽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단순히 소비에트의 정치, 경제에의 저항만이 아닌 도덕적 정신적 차원에서의 종교적 동기가 중심적 원인이 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79년여름, 교황 요한 바오로 II 세의 Poland 고향 방문이 이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이 방문을 통해 “두려워 하지 말라.” 라는 격려로 이들의 용기를 강화시켰고, 이것은 그 이웃인 체코, 헝가리 등에도 파급효과를 주었다고 하고 있다. 이들 동유럽인들에게 소비에트 지배 이전의 전통적 가치, 문화를 일깨워 주면서 건전한 문화는 신념에 뿌리를 둔 인간 영혼의 열매임을 강조하면서 이들을 이끌었다. 이때부터 저항운동은 지하화되어 각 개인을 통해 이 문화가 파급되었다는 것이 Elliott 교수의 주장이다
Solidarnocz 라는 깨어난 양심은 동유럽 전체에 위협과 탄압에 맞서게 하였다는 것이다.
Elliott 교수는 1989년 10월의 독일 Lei.pzig 에서의 기도를 앞세운 용감한 사람들의 시위에 동독 군인들은 발포를 명령 받았으나 70,000명의 사람들 ( 이들 전부가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이들은 그 군인들을 지나 Stasi ( 비밀경찰 )의 도발에도 비폭력 시위를 이어 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냉전은 끝났나?
USC의 Mary Sarotte 교수는 2009년에 “1989” 제하의 저서를 냈고, 올해에는 “ The Collapse: The Accidental Opening of the Berlin Wall ”을 출간했다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Sarotte 교수는 Council of Foreign Relations 의 후원으로 자기 저서에 도움을 준 R. Blackwill 전 대사, Churkin 주 유엔 러시아대사, Elbe 대사 ( Genscher 측근 ) 들을 초청, 상기 제목의 좌담회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미국, 소련, 독일의 입장을 회고하는 이들의 발언을 통해 관심을 끄는 내용들을 보면, 베를린 장벽 붕괴 6개월 전만 해도 누구도 이것을 예측하지 못했었다는 것, 또 Kissinger는 독일의 동방 정책과 그 지도자들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 등이다.
먼저 Blackwill 대사는 미국측, 대통령 Bush, 국무장관 Baker 등 은 독일의 사태를 1989년 봄부터 시작된 하나의 Process 로 보고 있었고, 미국은 이 사태를 "추인하고 이용하려는" 입장에 있었다고 하고 있다. 다만 이 Berlin 장벽의 붕괴는 Gorbachev 의 결정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었다.
한편 당시 소련 외무장관 Shevardnadze 의 측근이었던 Churkin은 동독을 포함하여 소련은 혼수상태에 있었고, 특히 소련은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으나. 미국에 그 원인이 있는 잘못된 국제관계로 소련의 미국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가져올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Gorbachev 는 1987년 “ New Thinking for the Country and for the World ” 저서를 내면서 미-소는 서로를 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냉전은 끝낼 수 있다고 보았었다.
반면 서부독일은 당시 Genscher 수상에 의해 NATO 와 Warsaw 와의 접촉을 통해 군사적 안정을 취해야 했고, 미국 ( Blackwill 이 인정했듯이 ) 은 Gorbachev가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었고 Berlin 사태를 관망하면서 독일과의 긴밀한 접촉 ( 특히 Bush- Kohl )을 유지하고 있었다.
Bush와 Baker, 그리고 Kohl 과 Genscher, Gorvachev 와 Shevardnadge, 그리고 이들 상호 간에는 깊은 신뢰관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었다.
사실상 전 동독 수상 Honecker 가 소련의 압력으로 물러난 후 후임 수상이 임명되었으나 내정을 장악, 통제할 상태가 못된 상태에서, 종전의 예로 보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으나 Gorbachev 는 이 두 가지 대안: 힘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두느냐 ? 중에서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Churkin의 견해였다. 그로서는 유럽에서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 modus vivendi”를 선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장벽 붕괴에서 독일 통일까지의 300일
1990년 3월부터 2 ( 동-서독 )+4 ( 미, 영, 불, 소 )회담이 열리고 있었으나 미국은 Gorbachev 측으로부터의 정책 선언을 듣고자 했고 그러나 그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려는 것 외에 뚜렷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적어도 1989년 봄부터 1990년 9월 까지 -이 미국측의 판단이었다.
1989년 12월 12일 Baker 국무장관으로부터 통일된 독일이 NATO 에 가입하는 조건에서 통일을 받아 들인다는 선언이 나왔고, 이에 따라 소련 내부의 정치적 흐름에 영향을 받을 염려가 있었던- 실각의 위험 - Gorbachev는 1990년 2월 7일 Kohl과 만난 자리에서 동의를 하였다. 그 후의 일은 2+4 조약에서 동의를 얻는 절차를 거치고 양독일 내의 법적인 절차를 거치는 일만 남게 되었다
독일의 통일로 냉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는 것이 이들 참석자들의 결론이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 지던 날 New York Times 는
“독일 청년들이 그 증오하던 Berlin 장벽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들은 즐거움을 위해, 역사를 위해 추고 있다. 그들은 75년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았던*( 1차 대전을 의미 ) 재난의 비극적 순환이 이제 드디어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추었다. “ 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 우리는 비록 혼란, 갈등, 그리고 고통이 결코 정말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즐길 수 있다” 고 하였다. ( 1989. Nov. 11 )
지금의 베를린은 25년전에 기대 되던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실현시킨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이지만 어떤 사람에 의하면, “베를린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때로는 현실이 그 궤도를 튀어나와 혼돈으로 가거나, 아니면 새로운 기쁨을 제시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예언하지 않은 방법으로 변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베를린 장벽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가?” NYT, Nov. 17
他山之石을 우리는 매우 소중이 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메르켈 수상의 말대로 꿈은 실현된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 될 것 같다. 그 Process를 우리가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마치 Wall 이 아닌 긴 DMZ를 Wall처럼 허물려고 하는 것 과 같다.
한반도의 독특한 성격은 무엇인가. 그 통일의 접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통일을, 그리고 그 정책을 좀 더 넓고 원대한 시각에서 재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Elliott 교수는 소련에서 samizdat ( 일종의 쪽지 소식지 ) 같은 것을 이용하여, 성경을 보급하거나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주는 활동이 그 붕괴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Utopie au Pouvoir’를 쓴 Heller 교수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북한의 대학생들, 특히 집안이 좋은 학생들 간에서 이른바 Subversive books 들이 돌고 있다는 뉴스가 Daily NK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2014, 11, 17 Daily NK ) 일본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자들은 그러나 ambivalent 한 측면이 있을 수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