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5-20 12:06
통영에서의 邂逅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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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에서의 邂逅
김영식 | 2013·03·02 20:10 | VOTE : 24 |
« 아니, 네가 웬일이냐 ?. » « 아니, 아버지—«
우리 父子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때는 1970년 대 初 한 여름, 장소는 통영항의 여객선 부두 앞,
나는 당시 사관학교 생도들의 해양훈련에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기차로 갔고 광주에서 부터는 현지 부대에서 지원 한 트럭을 타고 대 부대가 가마미 ( 영광군 소재 )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기는 했지만 또 그만큼 잘 보존이 되어서 그런지 해수욕장으로서는 물론 생도들의 해양 훈련을 위해서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열흘이 넘게 훈련 과정을 마치고 장교들은 개별적으로 교통편을 이용하여 귀경하도록 되었다. 광주로 이동하던 중에 뜻이 맞은 몇몇이 여수로 가서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기로 하였고, 지금으로 보면 한려수도를 관광 하는 노정을 택했다.
통영에서 배를 내려 부두를 벗어나려고 오르막을 오르던 중 나는 아주 낯익은 사람을 쳐다 보게 되었다. 카키색 반바지와 반팔 차림에 등산화와 배낭을 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은, 그 뜨거운 여름 햇살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참 지나서 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가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가 있는 여수로 가는 배를 타야 했고, 나는 동료 장교 들이 끄는 대로 기차를 타러 따라가야 했다.
그 한해 전에 어머니는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시한부로 6개월을 사신 후 돌아 가셨고, 아버지는 그 때부터 산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두 분이 동갑내기로 50년을 같이 사신 후 혼자 남으신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도 그 적적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집에는 남자들만 남았고, 자기 할 일을 바쁘게 하면서 집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하기도 힘들었다.
가마미에 내려 가면서도 제대로 간다고 인사도 못하고 갔던 차라 통영에서의 해후가 그렇게 어색하고 떨떠름하게 끝나야 했다.
남자는 나이가 50이 넘으면 자기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자기가 애들을 다 키우고 난 후에야 아버지의 功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구정일이 아버지가 돌아 가신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그렇게 고대하시던 88올림픽도 못 보시고—
나는 집에서 자던 중에 새벽에 큰 형님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고, 어머니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임종을 하지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정초가 되면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경주를 다녀오는 것을 매우 좋아 하셨다. 우리 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기차 여행을 하는 것도 좋았고 그 기차 안에서 도시락을 사먹는 것이 더 더욱 좋았다.
그러나 도착한 다음 날은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 토함산을 올라야 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토함산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는 일을 아버지는 좋아 하셨고 우리에게 새해의 각오를 다지도록 하셨다. 올라 갈 때는 징징거리면서 올라 갔지만 일출을 보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고 내려올 때는 대단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힘차게 내려왔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이틀 전에 나는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은 한 달 반 동안의 여행에서 돌아 왔다.
나로서는 그 여행이 가지는 의미에 충실하고자 여행 끝까지 조그만한 일에 까지 신경을 쓰면서 다녔던 관계로 매우 피곤한 상태로 돌아 왔다.
미 국무성의 소련국, 북한 데스크, 그리고 헤리티지 재단, CSIS, Carnegie Endowment Foundation, 그 외에도 미국 상원 의원, Marshall Institute, VOA, 그 다음에는 각 지역의 대학을 방문 하고 마지막으로 Hawaii 에서 태평양 함대, Pacific Forum, 등을 방문 하면서 정부 관리, 연구위원, 대학 교수, 의회위원 들과 주로 한반도문제, 북한 문제 등을 주제로 논의를 했다.
내 경력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 방문을 통해 얻었던 소중한 자산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 주지를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그 해 추석 때 나는 내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할 데가 없어 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고, 그런 느낌은 엊그제 설날에도 변함이 없었다.
얼마 전에 나는 피부에 좋다는 말을 듣고 남해에 있는 편백나무 휴양림에 다녀 왔다. 조용하고 잔잔한 새벽 바다, 섬과 섬을 잇는 다리들 을 보며 나는 이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자연적 환경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고, 그 편안함에 빠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사이에 시간을 내어 통영을 다시 찾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커다란 여객선 터미날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버지를 만났던 한 여름의 풍경을 상상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돌아 오는 길에 진주를 거쳐 오면서 義妓 논개의 영정을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조금은 추운 날씨였지만 덕분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한가롭게 볼 수 있었다. 그 그림에서 손가락마다 옥가락지를 낀 모습이 날씨 탓인지 더 차분하고 또 한편으로는 강한 의지를 지닌 느낌을 주었다. 勇 보다는 義가 더 적합한 표현이었다는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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