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식
IV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Obama 대통령의 한반도에 대한 시도이다.
이미 실패한 것이라는 일부의 평가가 있지만, 아직도 재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고, 실제로 미국은 이란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시도하고 있으며, 최근 다시 미 의회에서 이란에 대한 제재의 움직임이 다시 나타나고 있으나, 4월이 지나면 그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 Strategic Patience" 으로 대표되는 Obama 대통령의 북핵에 대한 시도는 2009년 4월의 프라그에서 열렸던 회의에서 했던 연설에서 시작되었다. 1994년의 Agreed Framework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것은 미국이 여러차례 북한에게 NPT와 IAEA 규정에 따라 비핵국가가 되면 미국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핵 국가인 중국과의 동맹 등이 문제가 되어 당시로는 진전이 없었으나, 프라그에서 Obama 대통령은 핵없는 세계를 제시하면서 비확산을 가져오기 위한 Negative Security Assurance 원칙을 제시하였다. 이 명백한 원칙은 2010년 4월 미국이 공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북한에게 비확산의 의무에 따르는 비 핵무기 국가에게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장한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이 2009년 1월 핵 무기 보유의 이유를 미국으로 부터의 핵 위협에 억지적인 의미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그리고 2012년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Scott Snyder 는 이것을 G.W. Bush 정부 말기에 있었던 잘못된 ( botched ) 협상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2012년에 이르기 까지 Leap day Agreement 로 Obama 정부가 시도 했던 것은 미국정부가 북한에게 Incentive 를 준 것으로 볼 수도 있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4월, Obama 대통령의 방한 여부가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이란과의 협정 갱신 여부에 따라 그 일정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Jeffrey Lewis 와 Peter Hayes 는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북핵의 공격 대상이 안되는 보장을 받는 문제에 대한 한국의 안보 분석가 들의 무감각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색들이 갖는 중요성은 이런 해결 접근은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적어도 핵 문제에 관한 한,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데 있다.
V
최근 국정원장과 통일원 장관이 비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한 통일의 시기가 북한의 사태와 관련하여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정원장은 2015년을 그 시기로 제시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반면, 주무장관인 통일원 장관은, 처음에는 북한을 괜히 들쑤셨다가 역 효과를 낳을수 있다는 우려섞인 신중론을 표했으나 곧 이어서는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통일은 조만간 이뤄질 수 없는 상황” 이라고 언급했다.
주요 각료들 간에 이런 말이 오갔다는 것 자체가 관심을 끄는 일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주무장관으로서 “이뤄질 수 없다” 는, 또 “많은 변수 때문에” 라는 표현은 유감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통일문제에 대해서 독일의 경우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요체는 서독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자세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1969년 10월 브란트는 동방정책을 제시하면서, “이제 시작합니다.” 라고 국제 사회에 공표를 했고, 20년이 지나서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또한 동방정책의 핵심은 “ 접근을 통한 변화” 에 있었다.
통일의 시기에 관한 연구는 한국보다는 주로 미국의 연구소들을 통해 발표된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들 보고서들은 짧게는 2017년, 길게는 2030년을 그 시기로 제시하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에 대한 보고서들은 대개 10중의 2는 Air-strike ( surgical )를, 극히 소수의 보고서가 북한의 Soft-landing 을 제시하고 있고, 나머지는 대체적으로 북한의 붕괴에 대한 씨나리오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핵 시설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부분적으로는 중국과의 분할 점령을 포함하고 있다.
최근 나토 사무총장이 3-5년에 북한의 붕괴를 언급한 것도 있지만, 주변의 정보 환경이 제시하는 상황의 전개에 대해 면밀한 분석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독일 통일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콜, 브란트 ( 에곤 바르 ), 겐셔 등은 자기들이 1989년 독일 통일의 기회를 재빨리 포착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조금만 늦었어도 러시아에서의 정변 등으로 기회를 상실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것은 이들 3인이 모두 각각 -사민당의 브란트를 포함하여- 콜-기독교민주연합당, 슈미트-사민당, 겐셔-자민당 등으로 정당을 달리하면서도 이러한 통일 과업을 달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통일 문제에 대한 서독인들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하면서, 책임있는 독일의 지식인 으로서 통합된 독일의 미래에 우선을 두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살아있는 양심으로서 정적들과도 만나고 통합을 이루게 했던 것이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대통령을 지낸 바이스체커는 민주적 원리와 관용을 강조하면서 정당들의 사회적 책임을 내세우면서 의회를 개혁하였고, 치우침 없이 역사에 겸손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데 힘을 썼다.
독일인들은 우리가 통일 비용의 문제를 언급하자, 우리에게 통일비용보다는 분단, 희생의 비용이 더 크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VI
갑오년을 맞으면서, 120년 전에 상황과는 다르지만, 당시에 극복하기 어려웠던 시련을 다시 돌아보면서 오늘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각오를 다지는 것은 새해를 맞는 자세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일 것이다.
1980년대 초, 빠리 서쪽 교외에 있는 BDIC 라는 도서관에서 “ La Coree libre " 라는 정기 간행물을 처음 볼 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책자는 1919년 1차 대전이 끝난 후에 열린 빠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던 3인- 상해 대표 김 규식, 시베리아 한인대표 윤해, 그리고 1차 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던 한인 황 모 씨 - 이 참석을 거부 당하고 빠리에서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1년 이상 발간했던 것이다.
이 들은 그 첫 호에서 3.1 운동의 실상을, 곧 일본 군의 만행으로 살상된 인원과 방화 파괴된 시설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었고, 또 독립을 위해서 매진하려는 결의와 함께 독립의 염원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었다.
1989년 6월 14일 고르바쵸프는 서독 본을 방문하여 독일 통일의 본격적 과정인 “ 본 선언 ”을 통해 독-소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올리는 문서에 콜과 같이 서명하면서 “ 이해와 화해를 통해 과거를 치유하고 함께 더 낳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독일) 국민들의 깊고 오랫동안 간직해온 열망에 따른 것 ” 임을 선언하였다.
또 다른 독립의 의미로 통일을 추구하면서, 독일 국민들이 간직해 왔고, 성취한 그 염원과 열망을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하려는 확고한 각오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