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o-cons 과 일본
아베 일본 총리가 어제 ( 9월 25일 ) 미국의 보수주의적 연구단체로 알려진 Hudson 연구
소로부터 그 연구소의 설립자인 Herman Kahn 의 이름을 딴 “ 칸 賞 ”을 수상했다. 83년에
작고한 물리학자 출신으로 역시 핵 전략의 수립에 게임이론을 사용했던 Kahn 은 핵 폭탄의
제조와 관련된 Abdul Quareem Kahn 과는 다른 사람이다. H. Kahn은 핵전략 이론에 기여
를 한 보수주의자로 말년에는 미래학에도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2010년부터 Project for New American Century, Neo-conservatives 의 결사체에
서명을 한 Dan Quayle 공화당 부통령후보 출마자를 비롯하여 Dick Cheney 부통령, 2011년
에는 McCain 상원의원 등이 Kahn 상 수여식에 참여하는 등 변화를 보였다. Dick Cheney전
부통령은 2012년에 Kahn 상을 받았고, 2010년의 수상식에는 일본의 아베 도 참석하여 축
사를 했다.
어제 아베 총리가 수상직후 언급한 내용 중에서 “ 나를 군국주의자라고 불러도 좋다”고 한
말은 그 수상식이 벌어진 모임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집권 이후 아베 총리가 추진해온 일본 헌법의 재 해석에 따른 자위권의 회복, 군사
력의 강화, 등의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국 평론가 Jim Lobe 에 따르면 이들 Neo-cons 들은 심지어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미국
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신 나치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군국주의자‘ 아베 정도는 중국의 봉쇄
를 위해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지난 8월 21-23 간의 McCain 의원의 일본 방문, 그리고 곧 이어서 한국을 방문해
서 인터뷰 한 내용을 첨부하면, 미-일, 한-미 관계의 미묘한 진전을 어느 정도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McCain 은 일본에서 아베와 회담을 하고 이어서 국방장관과도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은 미군 해병대의 괌으로의 이전을 예산을 통해 지원해 주면서 일본의 부담을 절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아베는 맥케인 의원이 미-일 동맹을 강력히 추진한 것에 감사
를 표했고, 맥케인은 일본 헌법 재해석과 이에 따른 집단 자위권에 동의를 해 주었다.
한편 일본 국방장관은 남지나 해에서의 무력행사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상원에서 채택한 것
에 감사를 표했고, McCain의원은 센가꾸 문제에서의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다.
상원의원의 신분으로 일본에게 이런 의사 표현을 가능케 했던 것은 그가 지난번 대통령 선
거의 공화당 출마자 였다는 사실과 그의 배후에는 Neo-cons 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있다.
작년 년말에 쓴 글에서 Joel Wit는 공화당이 이들 Neo-con 과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장악
되어있다고 지적한데 미루어 볼 때, 미국에서 공화당의 집권이 한국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
질 것인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매케인은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에 주둔해 있는 미군들은 미국의 경제와 예산의 영향
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통해 방위비 분담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했고, 또 일본이 변화를 필
요를 하는 시기 이기 때문에 쓰라린 역사의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결을 할 문제라고 하면서
한-일간의 동맹관계를 강조하는 발언을 하여 어느 기자의 말을 빌리면 일본의 입장을 두둔
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 Neo-cons 들의 한국 방문,- Dick Cheney 전 부통령, McCain의원, 그리고 Eberstadt
연구원 등, -이 주로 아산정책연구원을 그 회견 및 견해 발표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
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McCain 의원은 월남 참전 용사로 알려져 있으나 대통령 출마 전후하여 더 Neo-con의 입
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부통령으로 Palin 전 알라스카 주 지사를 택한 것은
Neo-con 의 중심 인물인 Kristol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고, 다음 공화당 의 대통령 후보를
이들이 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Jim Lobe는 2006년말에 쓴 글에서 이들 Neo-con 세력이 이락의 평정과 철수 과정에서부
터 소외되고 Gates 국방장관의 등장과 더불어 퇴세에 들어 갔다고 하고 있으나 최근의
McCain 등의 활동은 이를 거슬러 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의 공화당이 지배적인 주 지역에서 널리 읽혀지는 'RedState' 라는 신문에는 “
Neo-cons and Liberal War Hawks: Two Sides of the Same Coin ”이라는 제하에 이들
Neo-Con 의 득세를 우려하는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 단체들이 한국전쟁과 같은 특수 상황이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를 통해 일본 경제의 부흥을 가져 왔다고 보는 관점은 한반도에서의 극한적 대립이 더욱 이
관계를 강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도 이들 Neo-con에 관련된 인사들 - Woolsey 전 CIA 국장 등 -이 오바마 정부에
게 북핵에 대한 공격을 촉구하는 발언을 계속하고 있으며, Nautilus 와 같은 공화당 계열의
연구소는 최근에 다시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에 대비한 비상계획을 마련할 것을 강좌고 있는
데 이것에 따르면 북한을 미-중 간에 분할 점령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인 것은 시리아에의 전쟁을 Obama 대통령에게 강력히 주장했던 McCain처럼 Neo-con 들
이 세계의 리더로서 미국의 개입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최근 ABC 방송 등 언론사들이 조
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34:62로, Neo-con 들의 견해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책에 대한 批判과 反美
작년이 한-미 수교 130주년, 올해가 한국 전쟁 후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0 주년 등, 한-
미 관계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의 역사적 의미를 표징하는 단계를 지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의미를 수교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에서 찾고자 한다면 조선 말기
부터 미국의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 그 오랜 시간을 꿰뚫는 추세적인 경향이었다고
외교사는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조선의 희망에 등을 돌리고 1907년 Taft-까쯔라 조약을 통해 필리핀과
교환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여 주었다.
군국주의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에 미군은 한반도 상륙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일본 관동군의 저항을 예상하여 소련군의 참전과 한반도 진군을 위한 전략을 채택하는
과정과 루즈벨트의 사망은 그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방
법으로 소련과 타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중국 대륙에서 “먼지가 가라 앉을 때 까지” 뚜렷한 정치적 대안
을 제시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이 만주로부터 진군한 소련군의 지원으로 장개석 군을 제압
할 때 까지 George Marshall 장군을 1946년 초에 중국에 보내 국-공 합작을 시도하는 시행
착오를 한 끝에 중국 대륙을 공산세력이 장악하자 한반도에 있는 미군을 1949년 6월 까지철군할 것을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임무를 끝내고 다시 국무장관으로 복귀한 Marshall 은 한반도 문제를 국
제연합에 회부시키면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진주한 미군은 휴전 협정 체결 후 대부분 철군하였으나, 그 이후에 남아있
던 미군은 남-북대화가 처음 있었던 해에 부분적으로 철수 했고, 다시 1976년 카터대통령의
철군정책으로 부분적으로 철수 했다.
1970년 이후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무기 수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으며, 한
국 정부에 대한 정책적 압력의 수단으로 미국이 그 철군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주한 미군은
자주 애용되었다.
7,80년대의 한국의 국제정치 학자들의 연구 주제는 대부분 “00 미 행정부의 대 한반도 정
책”과 같은 천편일률적인 제목이 지배적이었다. 냉전 시대를 보내면서 강대국 간의 관계가
미치는 파급 효과를 파악하려는 연구 테마나 연구 방법이 한국 국제정치계를 지배했다는 것
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강대국 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국제적 기류에 대항하거나 거스르려는 태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 兩極체제의 특성인 만큼 그 비판이 용납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76년의 철군을 내 세운 카터 대통령의 정책은 미국 내부의 비판은 제처두고 한국으로
부터의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그 비판은 설득적인 방법을 통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의 某 장관은 그 철군론의 주요 참모였던 미국의 C 교수를 초치하여 한반도 문제의 지
정학적 성격, 주변국들의 외교사적 논점 들을 들어 설득하였고 끝내 그의 철군론을 번복하
도록 하였다.
이 후에 전개된 북방정책, 그리고 햇볕정책 등 은 독자적인 정책의 전개와 그것을 통한 독
립적 외교의 논리적 전개, 그리고 평화, 통일 등의 목적을 내세운 미래를 지향하는 외교를
시도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에 추구된 북방정책은 80년대 말의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적대국가들 과의 관계를 개
선하는 효과를 낳았고, 2000년대의 햇볕 정책은 남-북한 관계에서의 새로운 Rapprochement
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서 반미주의가 표출되었고, 이것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입장과 관련되어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러한 운동의 귀결은 김대
중 정부의 출현 이후 하나의 “진보적인” 세력으로 남아 중국, 북한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내세우고 있다.
북방정책이나 햇볕정책 등은 통일원 내의 연구진이나 관련 학자들에게서 늘 거론되던 것들
이었고, 다만 그 정책이 추진되었던 상황이나 세력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햇
볕 정책에 대해 최근에 많이 나타난 북한 관련 웹사이트들에서 볼 수 있는 외국 소장학자들
의 笑話 적인 표현은 관심있는 연구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북방정책은 그 이후 중국과 소련, 그 후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는 결과로 이어졌
으나 햇볕 정책 이후의 남-북한 관계는 정권 간의 그 변화의 起伏 이 너무 커서 그 효과라
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으며. 그런 의미에서 통일, 북한 문제에서의 초당적
자세가 아쉽다.
최근에 출간된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 ( 당시 외무차관 )의 회고록에서 김대중-부시의 회담을
“실패” 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의 햇볕 정책의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정책의 주요 자문자로 알려진 문정인 교수도 햇볕정책이 실패했다고 표현하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