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참모들
民主化 된 이후의 대통령의 경우에 국한 시켜서 그 참모들과의 관계를 언급해 보자. 아직까지 한국의 대통령은 連任, 또는 重任을 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통령의 첫 임기는 언제나 초보의 입장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기본적으로 분류해서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제로 분류해 보는 경우 대통령제, 그것도 다시 세분하면, 프랑스식 대통령제, 대통령과 총리가 동거하는 제도를 쓰고 있고, 그러나 그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의회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총리의 선출 방법, 권리에서의 문제등 에서는 국가 마다 조금씩 차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보유하고 행사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통령의 집무실을 포함한 백악관은 총 5,000 여명의 연방 관리 들이 보좌를 하고 있고, 이들 중 1,800 여명이 미국 정부의 15개 부처에서 나온 관리들이 대통령을 핵심적으로 보좌하고 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자주 접했던 미국의 경우를 들어서 이 주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이해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미국의 경우 국무장관 ( Secretary of State ) 또는 안보 보좌관 ( National Security Advisor ) 이라는 명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여 하나의 팀이 되어 그 정책, 전략적인 측면에서 그 기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국무장관과 안보 보좌관들
아시아 문제와 관련한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업적들을 통해 그가 이룩한 것들, 그리고 그 참모들과의 관계를 살펴 보는 것은 미국의 대외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들 중에 10인을 선정한 것을 보면 아시아와 관련된 인사로는 Henry Kissinger( 10위 ), George C. Marshall (5위 ) Dean Acheson ( 6위 ) 등이 있다.
Marshall 은 軍 출신으로 역대 국무장관 중 가장 짧은 2년 ( 47-49 ) 간 재직했으나, 그가 담당한 일은 NATO 구축 문제, 대소 봉쇄를 위한 Truman Doctrine, 유럽의 전후 복구에 대한 Marshall Plan, 등 그 중요성에서 높은 정책 등을 담당했으며, 국무 장관으로 되기 직전에 담당했던 중국에서의 국공 합작을 위한 특별 임무 ( 1946 )에서는 소기의 업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Marshall 은 그 후에 국무장관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후에 미국은 한반도로부터의 미국 점령군의 철수 문제, 한반도 문제의 국제 연합으로의 이관, 등이 추진된 것으로 미국의 FRUS의 문서로 나와 있다.
그 후임으로 국무장관으로 등장한 Acheson ( 49-53 )은 NATO 를 완성했고, 한국 전쟁에의 미국의 개입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으나, 그는 그 직전에 발표한 Acheson 선언으로 한국을 그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바가 있었다. 한국 전쟁의 발발 시 까지 한반도 문제는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였다.
Kissinger 는 Nixon 대통령의 Guam 선언으로 “Asia 는 아시아 인에게” 라는 미국 정책의 전환이 이루어 지게 된 배후의 인물로 등장하여 ( 73-77 ), Vietnam 으로 부터의 미군 철수, 중국과의 긴장완화, 등을 통한 평화 추구를 위한 이른바 “Shuttle Diplomacy” 를 펼쳤으며, 이를 위해 560,000 km 의 답방을 했던 인물로 국무 장관 이전에 국가 안보 특별 보좌관을 지냈고, Ford 대통령의 임기까지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미-중 화해를 위한 평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남-북한 간의 관계 안정을 증명하기 위한 남-북한 간의 대화를 조성하도록 이끌었으며,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한 3당국 회담, 4자 회담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역대 국무장관들중 중요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을 50위 까지 추려 보면, 미국의 대아사아 정책의 추이와 미국 정책에서의 아시아 문제를 다룬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들을 종합해 보면 그 정책 내용의 일관성, 또는 핵심 목표들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사람들을 제외한 역대 국무위원들 이외에도 국제적, 또는 아시아 문제에서의 전환을 가져온 사람들을 年代 별로 보면, 우선 Franklin Roosevelt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는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서 민주당 출신이지만 재임 중에 세계적 대공황과 2차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과감하게 미국의 전통적 고립주의( Monroe Doctrine )로부터 벗어나 Good Neighbor Policy를 채택하면서 New Deal 정책과 2차대전에의 참전을 결정한 인물이다.
그는 민주당 내각에 공화당 출신인 Henry Stimson을 국방장관에 , 그리고 William Knox를 해군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전무후무한 역대 4선의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1945년 4월 사망하였다. 그가 제시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질서를 국제연합이라는 국제 기구를 통해 구축하려고 하였고 여기서 그는 4대 강국에 의한 안보리를 구상하면서 그전까지 미미한 존재였던 중국이라는 국가를 그 구성원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키고 아시아의 유일한 강국으로 중국을 상정하면서 이 지역에서의 세력균형의 중심으로 작용하도록 동시에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이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서 그 역할을 못함에 따라 유럽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소련이 대일본 전에 참전하는 결과 ( 1945,08,08 )를 낳았고, 이것은 아시아의 장래에 혼란과 불안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중국대륙의 공산화, 한반도의 분할과 한국 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Roosevelt는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무장관인 Hull 보다는 자신이 직접 그 구상을 실현시키려는 의도를 보였고 그의 구상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연합국들과의 관계를 이끌기 위해 그가 중요하게 기용한 사람은 Harry Hopkins ( 1890-1946 )였다. 그는 Roosevelt 대통령이 뉴욕 주 지사로 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며, 1938년 내각에 상무장관으로 기용하였고, 그 후에는 대통령 고문으로 카이로 테헤란, 등 각종 국제 회담에 참석하였고 위암으로 1946년에 사망하였다..
오늘날 까지도 Truman 대통령이 Roosevelt 대통령의 전후에 관한 정책을 제대로 이어 받았는가 하는 것이 미-소간 냉전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제로 되어 왔다.
동-서의 문제와 지도자 간의 신뢰 문제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한 팀을 이루고 달성한 업적 중 가장 기념비 적인 것은 소련의 붕괴를 비롯한 냉전 체제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Reagan 대통령과 Shultz 국무장관의 팀 ( 82-87 )은 그 출발 초기에 Neo-con 들의 주장과 또 내각 내부의 의견 충돌- 주로 Weinberger 국방장관과 Casey CIA 국장등 강경론자들과의 불화로 인한 – 로 Reagan 대통령은 Shultz 국무장관의 사임을 걱정할 정도 였으나, Shultz 는 대통령의 지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자기의 원칙을 지켜 나갔다.
Reagan 과 Shultz 는 한팀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현실로 받아 들이고 두 강대국 간의 힘의 경쟁관계를 넘어서서 이념적 전쟁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당시의 진영간 안정된 대치를 초월하는 공격적 전략을 제시하면서 소련의 공산주의를 사상적으로 공격하고 더 낳은 삶의 방식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 종교적 자유를 제시하였다. Will Imboden 은 Shultz 가 역대 국무장관 들중 가장 동반자적 입장을 강조했고, Shultz 는 Reagan 의 전략을 충실히 따르고 수행해 나갔음을 강조하고 있다.( Foreign Policy, Was George Shultz America’s Best Secretary of State? Feb. 8, 2021 )
Shultz 는 Nixon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고,미국 정부내에서의 경력이 풍부한 만큼 그 는 친구나 적을 막론하고 상대방의 견해를 끝까지 들어 주고 그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Shultz 가 남긴 글에서 그가 닉슨행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1973년 러시아를 방문하여 그 당시 소련의 재무장관과 무명 용사 묘비에 헌화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 내용은 모두에게 김동을 주었고, 그 후에 그는 소련과의 관계에서 신뢰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소련과의 협상을 중요시 하면서 서로 양보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전략 무기 협상을 주도해 나갔고, 외교적 협상을 기조로 하여 4개 항목을 소련과의 협상 주제로 하면서 인권 문제, 민주주의 문제, 그리고 전략무기 협상에서 진전을 이끌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Reagan- Shultz 는 소련이 얼마나 버틸 것인가에 대한 견해에서 대부분의 경력 전문가, 특히 CIA 와 견해를 달리하였으나, 끝내 소련의 붕괴를 가져온 것은 끈기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Kissinger 등은 Gorbachev 와 그 외무장관 Shevardnadze 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Shultz 는 이들과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그 관계를 이끌어 갔고, 초당적으로 인사를 기용하면서 미-소 관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에 Reagan 이 추구한 군사 현대화와 경제적 변화가 크게 작용했슴은 물론이다.
Reagan 대통령의 안목에서 Shultz의 능력이 발탁되었고, Shultz 의 헌신적인 봉사로 Reagan 의 정신과 취지는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Telegraf 지에 실린 “What Biden, Blinken could learn From Reagan and Shultz?”( 19, August , 2022 ) 제하의 글에서는 가장 위험하고 필요한 시기에 미국의 Blinken 은 회피를 하고 있고, William Burns 를 이용한 Back Channel 외교만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Reagan과 Shultz의 외교를 배울 것을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