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은의 외교
Pompeo 국무장관의 네번째 평양 방문은 무사히
예정되었던 일정과 협의를 끝내고 종결되었다. Pompeo 자신도 이 방문을 매우 좋았던 것으로 평가했고, 북한 노동신문도 좋은 분위기에서 끝난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예정된 주제는 2차 미-북한 정상회담의 장소, 일자
등을 합의하는 것,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는 그 회담에서 다룰 1차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의 진전을 위한 협의였었다. 공식적으로Pompeo 가 방문 결과를 한국에게도 전달했으나, 위에 언급된 그 이상의 내용은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미국 백악관에 브리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성과라고 한다면, 지난번에 폐기한 풍계리 핵 실험장 이외에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에도 국제 사찰단을 받아 들이겠다는 것과, 미국이 이러한 북한의 조치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영변 핵
시설에도 추후로 확대될 것으로 Pompeo 는 언급하고 있다.
이 회담 직전에 회담 참가 인원을 제한하는
언급이 있었고 국내 언론들은 왜 제한을 했는가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 인원 제한, 특히
미국 측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한 것은 결과적으로 논의 의제의 제한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보인다.
Pompeo는 비건 국무부 대북 정책특별대표가
제안한 비핵화 협상을 빈에서 개최하는 문제,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내애 비핵화를 위한 과정을
완성하는 문제를 평양 방문 이 전에 언급했고 여기에 미-북한 간에 북한의 특정한 핵 시설및 핵 무기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힌 것 등을 언급하였으나, 김정은과Pompeo 의 회담에서는 미-북 2차 정상회담의
문제,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합의된 비핵화의 진전을 위한 사항 만을 논의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김정은에 대한 평가
이Pompeo-김정은 회담이 끝난 후 싱가포르대학의 한 연구원은 글을 통해 김정은을 과소평가 하지 말것과 그는 매우 능력있는 협상가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한때 미-북한 핵 협상의 대표였던
조셉 윤은 김 정은이 북한의 진로를 바꾸려는데
매우 진지하며, 올해에 들어 가진 일련의 회담, 문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등 과의 회담에서 긍정적 신호를 보였다고 하면서, 북한을 위협으로 보든가 아니면 그 반대라고 보는
극단적인 평가보다는 외교적인 작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협상의지가 있는 상대자로 보고자 했다. 그는 검증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접근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셉 윤은 김정은이 5년 동안 유년기를 스위스에서 보냈다고 보았지만, 외국 자료룰 종합해
보면, 그는 8세에서 16세
까지 사춘기를 포함한 소년기를 가장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 보냈다는 것은 그의 성숙과정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다른 어느 서구 나라 소년에
못지않은 환경에서 터득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30대 중반의 나이이면서 60-70대 의 노련한 지도자들과 협의를 통해 자기의 의지를 관철해
나가려는 모습은 대단하지만 그가
국가의 정책을 이끌어 나가는 자신감과 신념은 북한의 외교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여러 북한의 외교 담당자들의 노력에서 그 도움을 얻은것이 틀림없다
.김정은은 문 대통령의 5월 미국 방문 후에 미-북 정상회담의 취소 통보를 받은 상태에서 문대통령을
통일각으로 초치하여 결과적으로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고, Pompeo의 평양 방문 취소 시에도 이와 유사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허담과 미국
미국과 관련하여 그 외교에서 언급할
사람은 허담 ( 1925-1991 ) 이 대표적일 것이다. 허담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모스크바 大 에서 유학을 한 후 북한 외무성에서 20여년이 넘는 기간동안 외무상, 부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대외관계를 이끌어 왔으며, 90년 노동당
정치위원을 끝으로 은퇴한 후 91년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냉전의 절정기인 70년대 후반에 UN 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의 대결에서 허담은 미국에
접근하여 주한 미군철수를 가져오게 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그 기회는1976년 카터의 대통령 당선에서 얻게 되었다. 허담은 북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77년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 사이러스 밴스의 서한에서 밝혀 짐 ), 한국의 야당 정치인 김영삼을 77년 6월 모스코에서 회동하기도 하였다.
김일성과 인척 관계이기도 했던 허담은
김일성을 수행하여 브레즈네프, 고르바쵸프 등과도 각각 회동하였으며,
83년 부터는 조평통 위원장을 담당하면서 남북연석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이미 71년 4월에 이른바 8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 이 8개항은 73년 6월 북한의 5개 통일 방안으로 다시 제의되었다 : 여기에 주한미군 철수가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
72년5월 부터 미군 철수를 주장하던 김일성은 카터의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76년 11월, 그리고 77년 2월 두차례에 걸쳐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를 통해 카터 대통령에게 접근 하였으며 당시에는 미국이 한국정부의 참여하에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거부하였으나, 79년 카터행정부는 한국 정부에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비 전투요원 1개 연대를 철수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당선 직후 부터 73년 중동전 이후 대립하고 있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노력하였으며, 1978년 Carter 대통령은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 베긴 이스라엘 총리 간의 비밀 협상을 주도하여 12일간의 비밀 협상
끝에 9월 17일 Camp
David Accords 를 성사시켰다. 이것에 의거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통일원 정책기획실에 근무를 하던
본인은 이 Camp David Accords ( A Framfwork for the Conclusion of
Peace Treaty Between Israel and Egypt ) 의 체결과정을 조사, 분석하도록
명령을 받고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의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에게는
핵관련 과학 기술의 제공, 그리고 이집트에게는 약 2억 불의
경제원조의 제공이 그 협상의 타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였다.
중동의 협상이 성공되고 난 직후 미국
정부는 곧 한반도 문제에의 개입을 선언하고 79년 미국의 중재로 남-북한이
참여하는 3당국 회담이 제시되었다. 물론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
출마시의 공약 사항이었던 주한
미군 철수를 거론하면서 한국 정부에게 이 회담에의 참여를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열린 남-북회담은 이른바 변칙 대좌로 불발되었다.
현재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있는
김영남도 허담보다는 3살 아래이면서 허담과 같은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을 했고 외무성에도 잠깐씩 근무하였지만
주로 노동당과 최고인민회의에서
일을 하였고, 모스크바대학 출신의 외교관은 2010년 까지
외무상을 지낸 강석주 ( 1939-2016 )에게 까지 계속되었으나,
최근에 등장한 리용호외무상, 리수용 대사, 그리고
김계관 등은 모두 평양에 있는 국제관계대학이나 외국어대학 출신이다.
2000년10월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Clinton 대통령과 미-북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했던 북한 공군의 조명록 차수 ( 1928-2010 )도
소련 공군대학에 유학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시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북
접근에의 도전적 요인들
주로 미국내에서 미-북한 접근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제재를 강화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로서 최근에 일간 신문에도 보도된 바에 의하면, Vipin
Narang ( MIT ), Victor Cha ( CFR ) 등이 대표적이다.
Vipin Narang 은Ankit Panda ( The Diplomat ) 와 같이 쓴 글 (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NYT, June 12, )에서 미-북간의 핵 협상에서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핵 보유국으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고, 따라서 이 협상은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되는 The Diplomat 는 일본의 입장을 많이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Ankit Panda 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Victor Cha 는Richard Armitage와 Joseph Nye 가 발행하는 미-일 동맹의 강화를 위해 발행하는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고 있다. 미-북한의 접근이 있을 때 마다 발행되는 이 보고서는 지난 1994년 미-북한간에 Agreed Framework ( 미국은 갈루치, 북한은 강석주가 가 각각 서명 )가 작성된 후에도 발행되어 미-일 동맹의
강화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하는 조치를 강구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 Armitage, Nye 보고서는 2000(INSS ), 2007 ( CSIS )에 도 발간 됨 )
미-북한이
핵문제에 관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올 10월 에도 Armitage 와 Nye 는Victor Cha 와 Michael Green 등을 초치하여 Reviewing the US-Japan Alliance for the 21st Century 의 제목하에 회의를
개최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서는 최근의 미-북한
간의 회담의 진전과 관계없이 미-일-한국은 동맹관계를 강화하여, 군사연습, 공동 작전 사령부,의
형성 등을 통해 이 삼각관계를 분쇄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좌절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More
Important than Ever, Oct. 3 CSIS )
이러한 도전적 요인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김정은, 트럼프, 문재인 등 지도자 들 간의
신뢰 관계이다. 이 신뢰관계의 척도는 다음 미-북 정상회담의
개최지가 어디로 결정될 것인가 에서 우선적으로 증명될 것이고 이것은 최종적으로 미-북 관계의 수립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
최근 미국의 Chicago Council on Global Affairs 에서 조사한 바( Oct. 2, )에 의하면, 미국인의 77%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의 포기시에 외교관계 수립을 지지한다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와 Pompeo, 그리고 Trump 대통령까지 한-미 간에 조율이 안된 상태에서, 북한의 비핵화에서의 진전이 없이, 남-북 간의 합의로 그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중간선거 이후로 2차 미-북 정상회담이 미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또 그 선거결과가 주는 영향도 감안하면, 선거 후의 미-북한 관계를 낙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자중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미 하원 중간 선거가 11월 6일로 예정되어 있고 상원의원의 33석도 새로 선출되는 등 앞으로 한달 이상의 기간이 미-북 관계에서의
공백이 예상되는 만큼, 남-북관계, 한-미 관계 등에서의 현황과 진전 사항에 대한 종합적안 점검이 필요하고
그 관계의 진전에서 페이스를 조절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할일을 미리 고려해 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적어도 현실적인 목표로 미-북간의 외교관계 수립, 또는 남-북한 간의 관계 발전의 단계적 추진 등에 관한 구체적 로드맵에
따라 진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것도 안되어 있는 상태에서 한반도의 변화를 동북아 국제 질서 문제
까지 확대 연결, 적용하는 구상을 하는 것은 과대 망상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문제의 발전도 남-북한 관계의 안정적 설정이 그 기반이 되어야 하고 그 위에서 교류와 협력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